해방일지

지루함의 해방일지

by 마흔에 글쓰다

"하루 5초, 7초 설레는 순간들.

그 쌓인 힘으로 하루를 버텨내요."


몇 해 전에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해방일지.. 뭐가 해방이지? 우울해서 술을 먹어야 사는 남자와 자신이 못 견디게 바닥이라 '사랑으론 안돼. 날 추앙해요.'라고 말하는 여자가 있다. 남자와 여자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한번 꽂히면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는 하루하루 버텨내는 그들에게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위로를 받는다.


어느 여배우가 쓴 글을 읽다가 지루함을 안고 살고 있다는 말에 의아했다. 아, 그런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도 지루하구나. 어쩌면 우리는 평생이 지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루하다는 것은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과 있는 것도 싫고, 쇼핑도 싫고, 그냥 다 지루해졌다. 흥미가 떨어졌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생각을 민감하게 읽어야 하고, 맞춰줘야만 할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는 엄마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딸이었다. 그런 태도로 나의 성격이 만들어졌다. 나는 왜 그럴까? 어느 순간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게 나야.'


사는 게 지루하다. 원래 지루했는데 이제야 느끼는 것일까? 내가 평생 쓰던 에너지가 갈 곳을 잃어서일까? 그냥 지루해졌다. 이 지루함의 의미는 뭘까. 지루함을 대신할 것들로 나를 채워가고 있었나 보다. 지금은 멈춰있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런 걸 번아웃이라고 한다는데 내게도 번아웃이 온 것 같다.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나다움을 찾고 싶었던 건 아닐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지쳐 앉아 버렸다. 그런데 일상에서 찰나의 순간 지루함과 다른 느낌을 느낄 때가 있다. 너무 찰나에 지나가 여운이 남는다. 삶이란 그러한 순간들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닐까. 소멸될 것에 대한 불안보다 간직된 기억이 지루함을 달래는 유일한 길일 수도 있겠다. 의미가 좀 없으면 어때. 뭘 그렇게 의미를 찾아. 매번 어떻게 그렇게 살아?


아침에 일어나 켠 캔들의 향기가 기분을 좋게 한다. 삐거덕대는 나무 문을 열면 들어오는 시골 향기가 좋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놓고 좋아하는 것들로 아침을 먹는 시간, 정신없던 시간을 보내고 여유가 들어온다. 차를 타고 5분이면 서해바다가 보인다. 궁리 항의 가꾸지 않은 맨 얼굴이 들어온다. 각자 자신들의 일을 하느라 바쁘다. 단골 카페에 들어가 사장님이 특별히 블렌딩 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바다를 보며 멍하게 한참을 있다가 빠져나온다. 그런 것들로 찰나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난 행복한 사람이다. 가만히 느껴본다. 소소하게 감사한 이 순간들로 인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루하기에 순간을 느낀다. 지루하다는 건 '나'를 잃어버려서였을까. 찰나의 순간들에서 잃어버린 나를 발견한다. 아직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이란 길 위에 서 있다.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루하다. 혼자라고 느껴진다. 함께 있어도 나는 홀로 있다. 어쩌면 지루해서 살아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루하기에 살아있다. 나는 이렇게 지루함을 달래며 산다. 지루함에서 맨 얼굴의 나를 느낀다. 나의 지루함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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