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쿤데라, 이 사람아. 난 말일세.
세상 사람들이 자넬 궁금해하는
이유를 몰랐네.
그건 아직도 마찬가질세.
마치 저 그림처럼 세상은
자넬 검정 우산 위에 올려놓은
유리컵처럼 위태위태한 자리 한 칸을
내어준 뿐인 것을...
나는 자네가 붉게 타는 화염에
에워싸여 울부짖는 걸 보았지.
세상이 온통 특별해지려고들
생난리를 치고 있네.
또 독특하고 참신한 것들에 미쳤지.
그것들을 좇아 혈안이 돼 있다고!
듣고 있는가, 이 사람아.
그 속에 자네가 한 말들도
어느 정도는 자리 잡고 있지.
허나 어쩌겠나?
나마저 그러긴 싫다면서
결국 나란 인간도
이 염병할 편지를 쓰고 있구만.
이게 도대체 서평인가. 넋두리인가.
자네 판단에 맡기겠네.
2
혁명, 연애와 섹스, 그리고 창작-
모든 것은 자네와 나
그리고 우리라는 것을
세상이라는 것을 실은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단지 우리가 모르는 건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뿐이지.
희로애락이라는 게 청춘에만 혹은
노년에만 머물러있는 게 아니니까.
개혁이나 혁명 그런 것들도 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다 한 번씩 터지고
뭉개지곤 하잖나. 그러다가 얼마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져,
그리곤 잊어버리는 거지.
망각과 웃음의 조롱거리는
그대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
거미줄을 치네.
흉가나 폐가가 어둡고 음산하지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온갖 비애가 침투해 긴긴 역사를
증명하고 있거든.
성공이나 실패,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단 말일세.
후회하고 반성하는 게
오히려 훨씬 더 극적인 희망이야.
부디, 꼬투리를 잡아줬으면 하네.
자네 의견에 한 치의 반감이란 녀석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나를 설득시켜 줬으면 해.
어떤가,
이 건에 대해선
추후 자네 의견을 기다리겠네.
3
광기는 여자들의 전쟁뿐만이 아니야,
물론 그 말에도 몇 퍼센트 일리는 있어.
남자들의 전쟁이라 가정하면,
크로노스의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자식들처럼
여자의 입을 빌려서만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이니까.
남자를 말하는 걸세.
허니 여자의 입안에 가득 찬 양수가
고갈되는 일은 없어야 한단
결론이 나오네.
양수가 가득 찰수록
우리의 울부짖음도 끝나지 않을 걸세.
차마 두 눈을 뜨지도 못하고 감은 채,
가녀린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면서도
목이 터져라 울어 젖히며 태어나는
우리의 운명은 그 자체로 폭동이네.
자네가 체코란 땅과 하늘에
오직 체코국기의 향연만을
연주하고 싶었다면 그건
체코인으로서의 당연한
폭동이었던 걸세.
한때 우리도 그랬었지, 우리도
우리의 태극기를 휘날릴 수
있게는 되었어.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가야 할
길과 할 일이 많이 남았네.
안정이란... 그건 말일세.
상한가를 쳤다가는 금세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는
가망성까지를 내포하고 있네.
여하튼 조각조각 짜깁기해
만든 조각보도 아니고.
이놈의 대지는 지나치게 나뉘어 있어.
그걸 뭉치고 뭉쳐 유니온 베이라도
달성하고 나면 좀 느긋해질까.
글로벌이 아닐세,
정확히 말하겠네. 유니온 베이비,
그래 말해놓고 나니 보기도 듣기도 좋군.
다시 모여 어머니의 양수 안에서
옥작복작 즐겁게
사는 것도 괜찮겠네그려.
4
침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연인들의
화려한 아지트 아닌가.
처음 맨땅에서 비비적대다 보니
몸 여기저기 쑤시지 않은 곳이 없더군.
인간들의 두뇌는 얼마나 영악한 것인가.
좀 더 물컹거리면 좋겠다 싶었던 게지.
그때 침대가 짠하고 왕림하신 거야.
일종의 창조라고 할 수 있어.
그 위에 협소하지만, 아니 어쩌면
안채를 떡 버티고 앉았는
시부모의 방석처럼
침대의 위치는 급부상했네.
한번 앉은 방석 위에서 내려오기란
참으로 힘든 법이지.
섹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네.
이놈이 앉아도 앉아도 채워지지 않고
어딘가 2% 부족하고
하면 할수록 사라지는 길몽처럼
아쉽고 안타깝고 목마르고...
욕망이란 이름을 걸치고
육욕이란 가운으로 가리고
거울 앞에 서기 무섭게
인간은 가려야 했네. 어디를?
급한 대로 일단 보이는 곳부터.
그래도 소용없었지.
내가 타인이 되는 순간
나에겐 엄청 성능 좋은
투시경이 생겼거든.
오해하진 말게,
그 '나'라는 게
어디 정말 나뿐이겠는가.
'애브리원 + 레이디 앤 젠틀맨'이지.
우스운 게 뭔 줄 아나?
그 일이 내게로 넘어오면
다시 또 우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오그라든단 사실일세.
정말 웃기지 않나?
이렇듯 우린 내내 결코
망각해버리지도 못할
풍선이 됐다 투시경이 됐다를
반복하는 걸세. 그래도
침대는 자기 임무에만 충실하더군.
이 얼마나 진실된 가면이란 말인가.
참! 잊을 뻔했구먼.
요 며칠 전에 자네가 내 생일이라고
특별히 보내준 침대는 쓸 만하더군.
말나 온 김에 고맙네그려.
조금 더 무리해도 좋았을
뻔했지만 말일세.
농이네, 이 사람아.
5
자네가 그랬던가?
진보라는 생각에 현혹되는 자들은
모든 전진이 동시에 종말을
앞당긴다는 것을,
더 멀리와 앞으로라는
기분 좋은 명령어가 우리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하는 죽음이
선정적인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p337)
그 말에 아주 동의하네.
진보가 완료형이 되는 순간 '진보'라는
말 자체가 소용이 없어질 테니까.
차라리 '진보 중'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서 그런지 난 요즘
진보완 담을 쌓아버렸네.
그런데도 죽음이 재촉하지.
지랄 같은 세상이야.
지랄 같지만 안 지랄 같은 것들이
간혹 하나씩 태클을 걸어서
그나마 간신히 연명하고는 있지.
내 선정적인 죽음의 미소가
혹 자네의 촌락까지 미친다면
모쪼록 다행이라고 생각해 주게.
눈이 침침하구먼.
며칠째 불면증 요 녀석이
가만두지 않더군.
할 말이 많았는데, 생각나는 대로
다음에 더 얘기하기로 하세.
잊지 말게.
우리에겐 그간 밀린 얘기가
너무 많다는 걸 말일세.
단지 오늘, 지금 이 순간
다 쏟아내지 못했을 뿐이네.
침대가 부르는군.
오늘은 조금은 다른 용도로
써먹어야겠군. 하하.
'자네의 개그는 못 말리겠군.'
이라고 말하는
자네 모습이 눈에 선하구먼.
깨우지 말게.
그럼 담에 또 글로 만나세.
6
'제발 쿤데라 이 사람이
내가 한 말을 기억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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