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의 비밀
두 팔로 식탁 의자에 구부리고 앉은 다리를 감싼다. 한기가 느껴진다. 신축성 좋은 상의를 발끝까지 늘어뜨린다. 하체 가득 기모의 따듯함이 전해진다.
식탁 유리 아래, 명화 퍼즐에 잠깐 시선이 멈춘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 위에 꽃무늬 롤 티슈 케이스와 작고 동그란 화장 거울이 놓여있다. 얼굴 가까이 거울을 끌어당긴다. 잔뜩 찌푸린 미간, 건조한 입술, 눈밑 기미와 가무잡잡한 낯빛, 마치 에스프레소 같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재생시킨다. 눈물이 절실하다. 하지만 눈물은 그럴 생각이 없다. '네 감정은 네가 알아서 해. 이제 나도 지쳤거든' 매번 주어를 생략하고 싶다.
갑작스레 떠오른 단어, '궁상각치우'. 커피가 종이컵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추추... 몰아감 입질. 입맛이 없어 초코파이와 삶은 계란 하나, 사과 1/4쪽, 우유 300ml로 점심을 때운다. 종이컵에 티백 카푸치노를 탄다. 왜 하필 종이컵이냐고? 종이컵 특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데 필요한 우연을 계속 창조하고 싶어서. 어쨌든 나는 그것을 벌써 일곱 번째 재활용 중인데, 그 과정은 이렇다. 종이컵에 탄 커피를 마신다. 거기에 온수를 부어 또 마신다. 물로 한번 헹궈 식기 건조대에 엎어 말린다. 이를 최소 5차례 반복. 컵 안쪽 약간 누르스름해짐. 신비로움. 애정 폭발. 새것을 압도하는 슬픈 우아함. 자신의 처연을 아름답게 증거 하는 중. 그와 입 맞추는 중, 창가에 두고 발효 중.
모든 존재는 언젠가는 닳기 마련이다. 본
용도(일회용)를 거스른 주인의 스토킹으로 종이컵 이음새가 벌어진 모양이다. 그 안에서 신명 나게 미음微音을 내뿜는 커피 거품.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나는 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녀석은 식탁 위에서 비밀을 숨긴 채 내내 나를 응시하고 있었을 터. 내가 들이켠 순간, 녀석은 바짝 긴장했을 것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발각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 종이컵과 커피, 우린 한 몸.
앞으로 텅 빈 너의 신비를 얼마나 더 애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