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자전거와 닮았다. 학교 정문 앞에서 대여한 자전거를 끌고 운동장으로 들어선 11살 소녀는 시골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촌뜨기였다. 덜컹거리는 경운기만 보다 난생처음으로 핸들과 제 발의 리듬으로 굴러가는 바퀴가 신기하기만 했다. 중심 잡는데만 꼬박 한 시간이 걸린 끝에 소녀는 우주를 위태롭게 굴러갔다. 그 시절은 자연에서 멀어져 도시로 와 훗날 몸의 기억 안에서 간혹 되살아나곤 했다.
답답하다. 꾸준히 굴려야만 하는 이 삶이. 누군가에게 대신 좀 굴려달라고 매달리고 의지해야 하는 나이를 훨씬 지난 지금으로선 더더욱. 그럴 땐 방법이 없다. 동행인 없이 어느 한 곳 맘 놓고 가볼 수 없다면 여행에세이라도 읽어볼밖에. 그러나 저 '~라도'는 얼마나 민망하고 조악한 조사이던가.
갈대는 빈약한 풀이다. 바람 속으로 씨앗을 퍼뜨리는 풀은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늙음을 간직한다. 그것들은 바람인 것처럼 바람에 포개진다. 그러나 그 뿌리는 완강하게도 땅에 들어붙어 있다.(69쪽)
전북 김제에 외가가 있다. 구불텅한 흙길 사이로 1년 365일 진을 치는 논밭과 노인들의 내기 장기를 묵묵히 지켜보던 정자가 있는 곳. 누런 벼들 위를 날아다니는 날것들이 부러웠던 초등 3년을 나는 거기서 자랐다.
외가 동네에 있었던 강은 나에게 냇물 이상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과 비슷한 것들은 다 같아 보였다. 다만 물가라고 하는 건 좀 달랐다. 생명 있는 것들은 자신들이 거처할 물가로 득달같이 모여들었다. 갈대도 그랬다. 그의 안부는 아주 가끔 바람으로부터 전해 듣는다. ‘갈대가 흔들리는 건 니가 그리워서래’ 그 3년 동안 내 시선을 독차지한 그들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입을 닫는 대신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듣고 공감해 주는 건 그들밖엔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 시절의 아이는 어느덧 어른애가 돼버렸다.
빛 속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어서 빛 속에선 빛을 만질 수 없었고, 태백산의 가을빛은 다만 먼 그리움으로만 반짝였다.(253쪽)
나는 반짝이는 게 부담스럽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날씨와 시간에 따른 빛의 변화를 작품에 담았다. 숲은 빛의 율동을 기가 막히게 흡수했고, 그것은 그대로 자신의 장기가 되었다. 화가들은 신이 났다. 숲과 빛의 조화를 발견하는 기쁨에 넋을 잃고 붓을 놀렸다. 자작나무잎이 군데군데 빛을 마신 후의 교태는 대단해서 나조차 맥을 못 출 지경이었다.
'잎들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인다.'(91쪽)
'상록수의 숲은 짙고 깊게 푸르러서, 그 푸르름은 봄빛에 들뜨지 않는다. 숲의 푸르름은 겨울을 어려워하지 않는 엄정함으로 봄빛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93쪽)
오래전 소나무를 관찰한 적이 있다. 뾰족뾰족한 잎이 건강해 보이는 반면 몸통의 피부는 툭툭 갈라 터져 있었다. 순간 나는 그들이 가여웠다. 뿌리와 몸통에 기대 저만 홀로 튼튼한 잎은 밉살꾸러기.
흔들리니 반짝이는 걸까,
반짝이기 위해 흔들리는 걸까.
생명의 몸부림은 언제나 의문투성이다.
차는 살아 있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 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소승의 자유다 - 차는 책과 다르다.(104~105쪽)
우려먹는 차 맛과 단번에 마시는 차 맛은 천지차이다. 누구와 어디서 무슨 차를 마시느냐에 따라 추억의 명암도 달라진다. 나는 계피 향을 좋아해서 전통차 중 수정과를 좋아하지만 자주 마시지는 못한다. 그것의 달짝지근함과 은밀하게 어우러진 깔끔한 맛은 잣 두세 개로 절정을 이룬다. 비록 지금은 커피만 마시지만, 추억은 고운 장소에서 사랑하는 이와 나누던 향을 쉽게 잊지 못한다.
‘길을 나선다’라는 표현은 생의 입구와 같다. 현실은 녹록지 않은데, 삶은 능청을 떨며 우리의 걸음을 재촉한다. 하지만 나는 길이 두렵다. '빨리빨리'에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느린 영혼이기에. 이를 아는 삶은 늘 말하곤 한다.
급할 거 없어,
모든 내리막은 오르막의 예고편,
살면서 쓸데없는 과정이란 하나도 없거든.
단상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