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에서 경험의 축적이라는 것은.
한 달여간 준비한 대회 중계가 끝났다. 규모도 크고 사고의 위험도 높은 편이라 좀 긴장했었는데 늘 그렇듯 준비한 시간에 비해 방송은 순식간에 종료된다.
역시 생방송이 좋다. 신입일 때는 정신없이 긴장하던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그 매력을 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방송은 종종 말하듯 우주를 항해하는 것처럼 서로를 믿고 암흑 속을 전진하는 일이다.
부조정실에 앉아 이곳보다 몇백 배는 정신없는 중계차 소리를 인터컴을 통해 전해 듣는다. 현장을 준비시키는 연출 선배의 소리, 오디오니 비디오니 각 종 기계를 정비하는 기술팀의 분주한 투닥거림, 각각의 카메라를 점검 중인 촬영감독들과 조연출의 씩씩한 대답들. 나는 소리를 죽이고 그 소란스러움에 귀를 기울이다 간혹 현장이 놓치는 부분들, 체크해야 할 것들을 재빠르게 밀어 넣는다. 송수신기의 버튼을 누르고 그 소음들 사이로 내 목소리도 뛰어든다. 모두의 소리가 하나로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이 정신없는 소음들!
사람들은 웃음으로 긴장을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현장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실없는 농담도 많아진다.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라 사투리도 그 지역의 것들이다. 요란스러운 농담이 인터컴을 타고 도는 동안 가장 내향적인 사람들도 꼭 한 마디씩을 얹는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예민한 사람들은 언어에 날카로운 모서리가 달려있지만 누구도 섣불리 남을 탓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현장에서 보낸 백전노장들일수록 더 그렇다. 탓하는 건 시간만 축내는 짓이다. 현장에서는 무조건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그게 일종의 프로토콜 같은 거다.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하늘은 쾌청하고 전파로 화면에 전달돼 온 나주의 바람은 산들거린다. 여전히 사람 많은 곳에는 반드시 모여드는 정치인들과 으레 해야 하는 수많은 축사들을 뒤로하고 한참을 기다렸던 싸이클들이 쏜살같이 도로 위로 쏟아져나간다.
4시간 동안의 생방송. 덕분에 허리가 뻐근하다.
정말 서로 잘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가치관이 맞는 게 정말 하나도, 단 하나도 없는 바람에 사사건건 자주 투닥거렸던 국장님이 이런 날은 반드시 생각난다.
무조건 해야 해. 방송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초년생이었을 때 난 효율성이 낮거나 공적인 가치가 크지 않은 행사 프로그램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었다. 인력은 턱 없이 부족하고 어떻게든 갈아 넣어서 완료하고 나면 보람도 적게 느껴지던 방송들. 도대체 왜 이걸 꼭 해야 하는 걸까. 어디서든 방송 소재를 들고 와서 정신없이, 그러니까 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려는 로드맵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수시로 프로그램 편성을 던져대던 국장, 그때는 부장이었던 그 선배가 이해가 잘 가질 않았다.
무조건 하자. 무조건 만드는 거야.
국장은 나와 달리 차분한 대화가 가능한 차를 마시기보다 술을 좋아하던 분이고 어떤 결정에 대한 설명을 세밀하게 하는 편이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며 일을 가져오면 받고 편성을 하면 방송을 만드는 일은 반복하며 주고받았다. 느닷없이 발레요?? 저 발레 하나도 모르는데요???? 영화제 개막식이요????? 갑자기요????? 연극이요????? 네???? 부장님???????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고 어느 날, 이제는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던 선배가 불현듯 던진 말에 난 정말 오랫동안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해 왔다는 걸,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을 오해하고 있던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별히 중요한 대화도 아니었는데 그 말이 마음에 인을 남겼다. 지역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다. 인력도 모자라고 자본도 뭐. 언제나 방송은 돈을 쓰는 일이고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수지타산이 맞는 업이 아니다. 그래서 뭐든 하지 않으면 기회란 건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손에 익지 않은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며 제작팀도 성장한다. 마라톤, 발레, 연극, 토크쇼, 정통 다큐멘터리, 수많은 행사의 개폐회식들. 다소 두서없이 일을 잡아오던 선배는 뭐가 됐든 그 수많은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후배들에게 전달해 왔던 거였다. 세심하고 다정하게 인재를 육성하는 로드맵을 짤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가 던지는 수많은 변화구를 언젠가는 능란하게 받아낼 팀의 성장을 기대하면서 혼자 외롭게 피칭을 계속해왔던 거다.
그렇다. 방송은 해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지역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지역의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드니까. 어떤 기상천외한 행사를 부장이 들고 나타나더라도 그 안에서 경험이라는 자산을 축적할 수 있게 노력하는 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다.
이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정말 긴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선배가 바라보는 풍경을 이해하기까지의 시간이 이렇게나 오래 걸렸구나. 맞는 게 하나도 없어서 으르렁대던 노PD와 막내PD는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겨우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원팀이 됐다.
무조건 해야 해 방송은.
이제는 막무가내 같다고 생각했던 저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인재 양성의 로드맵이 정밀하게 짜여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우리가 뛰고 있는 현장은 안타깝게도 10년 후나 20년 후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곳이 아니다. 어떻게든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들을 그러모아서 앞으로 앞으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순간의 연속들.
이런 걸 다 방송해 주네 ㅋㅋ
하는 리플을 바라보며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무조건 해야 해 방송은.
우승이 없는 자전거 대회에 1등으로 도착한 사람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며 동네 방송이라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자리에 없는 국장님을 다시 떠올렸다.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건만 이제는 이런 방송을 제작할 때마다 그분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됐다. 참 안 맞는 선배. 그런데 그래.
무조건 해야 해 방송은.
그러니까 계속해서 이 암흑을 우당탕탕 뚫고나가보자고. 항해를 멈추지 않다보면 어딘가에 가 닿겠지.
승무원 여러분, 오늘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p.s 언제나 기상천외한 방송 프로그램 편성을 손에 들고 나타나 나를 기함하게 했던 그 국장선배가 그리워질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분하지만 역시 언젠가는 그 시간들을 무척 즐겁게 추억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지금 기분은 별로 안 좋음. 뭔가
진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