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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도시

연대의 표식

2016년 겨울과 2017년 5월을 보내며

by soulblue


금남로 1가에 서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거대한 도시의 제祭가 아닐까 하는.





2017년 오월의 전야제


광주는 특별한 도시가 아니다. 다른 지역들처럼 일자리는 언제나 부족하고 청년들은 도시를 떠난다. 정치적으로 야성을 잃지 않아 온 도시라지만 일상의 정치는 똑같이 비루하다. 서로의 욕망을 드러내며 추문으로 버글거리기도 했다가 어느 날 소리 없이 사그라지는, 적당히 부패하고 적당히 살만한 다른 도시들과 별 다르지 않은 일상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월이 되면 광주는 전혀 다른 도시가 된다.

매년 열리는 5.18 전야제는 광주의 심장으로 불리는 금남로 한 복판에서 진행된다. 이웃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 수많은 사람들이 한날 한 곳으로 모여든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일어나기 마련인 실랑이 하나 없이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도로가에 전시된 사진이나 팸플릿을 살펴보거나 행진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풍악을 울리기도 하고 민중가요를 부르기도 하고 많은 소리들이 한데 섞이지만 어딘지 차분하고 조용하게, 작은 실핏줄이 모여 거대한 동맥을 이루는 것처럼 소란스러운 일상에 묻혀 들리지 않던 낮은 박동이 하나의 거대한 북소리로 울려 퍼지는 순간, 그렇게 그날의 금남로는 정말 광주의 심장이 된다.


생각해보면 광주는 많은 이들의 제사가 며칠 간격으로 같은 날일 수밖에 없는 도시다. 무등산이 바로 보이는 옛 도청 앞 분수대 앞까지, 하얀 한복을 입고 행진하는 오월 어머니들의 모습은 그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한다. 한 도시 전체가 올리는 거대한 제, 어머님들은 여전히 치유되기 어려운 아픔을 안고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걷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흰 한복자락이 마치 그대로 금남로 끝에 와 닿아 있는 무등산 기슭을 타고 넘어 하늘로 향할 것 같이 휘날린다. 행진을 하는 이들도 그 행진을 지켜보는 이들도 그 깊은 슬픔과 그리움의 제에 함께 동참한다.


광주 트라우마 센터 취재 중 만난 한 어머님은 오월에 자식을 잃은 후 온갖 데모를 다 다녔다고 하신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고 진상규명을 요청하며. 그러면 형사들이 봉고차에 그런 어머니들을 가득 실어 황량한 논밭에 버렸다고 한다. 영화 <1982>에도 나왔던 장면이다. 어딘지 가늠할 수 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면서도 어머님은 다음 데모에 나갈 준비를 하며 걸었다고 한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도 있었던 일이라고 하셨다.


차를 몰던 택시 기사님은 라디오에서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자 "사실 나도 거기 있었어라, 무서워서 말을 못했제. 나 같은 사람 많제라.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뀌었어도 절대 입 밖으로 안 꺼냈제. 어찌 될지 모른께"라며 목소리를 낮춰 말씀하셨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고 한다. 같이 시위에 나섰던 용감했던 친구는 어딘가를 맞아 사람 구실 못하게 돼버렸고 동네에서 보던 사람들 중 일부는 결국 귀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시위에 참여했다가 신분이 노출된 사람들이 겪는 수난을 지켜보면서 본인 경험은 어디서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고 한다. "이제는 세상이 조금 변했으니 이런 말도 하는 거지." 기사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전야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사연과 같은 슬픔이 있다. 한 도시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한다. 이들은 오월의 기억에 피와 살을 붙여낸다.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일상의 기록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증언이자 증인이다. 모두가 도시가 올리는 거대한 제의 상주다.


'당신의 아픔을 내가 아오.'


2017년 5.18 민주화운동 전야제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었다. 오월 어머니들 뒤에 선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 뒤를 이어 행진하던 성주 군민들의 모습이 그것이었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사건이지만 세 무리 사람들은 하나의 행렬 속에 함께 섰다. 맨 앞줄에 섰던 오월어머니들의 손에는 치유와 희망을 상징하는 형상들을 수놓은 조각보가 들려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확실한 연대의 표식이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오월 어머니들이 팽목항에 걸었던 문구는 '당신의 아픔을 내가 아오'였다. 도시 전체가 아픔의 기억을 공유하는 광주는 다른 아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광주 시민상주모임>이 그런 경우다. 시민상주모임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해 광주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1000일 순례를 하며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촉구해왔다. 당신의 아픔을 내가 알기 때문이었다.


38년이 지났지만 광주 5.18의 진실 역시 쉽사리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종 발포명령자는 물론이고 실종자의 수, 암매장 장소 등 여전히 많은 부분이 흐릿한 의혹으로만 남아있다. 반면 이런 상황을 이용해 5.18 희생자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시도는 끊임없이 지속돼왔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같은 고통 속에 있다. 진실 규명은커녕 악의적인 비난과 왜곡된 정보가 유가족들의 마음을 두 번 찢어놓는다.


아무리 엄청난 사건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특히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에서는 더 그렇다. 5.18은 물론이고 제주 4.3, 대구 지하철 참사처럼 개인과 공동체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들조차 끊임없이 공유하고 상기시키지 않으면 결국 망각의 덫을 빠져나올 수 없다. 트라우마 관련 취재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한 도시가 이토록 오래 그 기억들을 공유하려 노력하고 있는 광주의 상황이 부럽다고 했다.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동력이자 연대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대는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된다.


그래서 세 무리의 사람들이 한 행렬 속에 함께 섰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행진 속을 함께 걷는다는 것은 너의 아픔을 내가 알고 있으며 기꺼이 그 상처를 공유하고 함께 전선에 서겠다는 강력한 연대 의지의 표현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2016년 촛불을 든 아이들


켄 로치 감독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타인의 아픔에 연대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시스템의 사각으로 내몰리면서도 다니엘 블레이크는 비혼모인 케이티를 위해 기꺼이 가진 것들을 나누려 한다. 타인의 아픔에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다. 다니엘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타인과 연대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의지의 표명이었다.


2016년 겨울, 거리로 나온 아이들의 모습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를 발견한다. 어린 녀석들이 뭘 알겠냐는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거리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기자회견을 열고 집회를 하고 밤이면 촛불들 사이로 섞여 든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수많은 또래 친구들이 그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 이유였다. 차분하게 어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세상을 응시한다. 일렁거리는 촛불이 형형한 눈빛들을 비추는 광경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부끄러움과 미안함으로.


이들은 오월 어머니들의 행진을 따라 걷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일상을 내어줄 줄 아는 시민 상주들의 노란 리본을 보며 자라났다. 세월호의 침몰을 목격하고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렸던 겨울을 기억하는 세대다. 이 아이들은 이제 매년, 오월의 광주를 경험하며 계속해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고 연대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거대한 도시의 祭에 참여하며 자라온 아이들. 거기에 희망이 있다.

2017년 촛불의 힘으로 새로운 정권들이 들어섰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5.18과 세월호뿐만이 아니라 제주 강정과 경북 성주 등 잊지 않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수없이 많이 남아있다. 언제나 누군가는 상처 입고 잊혀가기 마련인 현실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오월 어머니들처럼, 시민 상주들처럼, 또 아이들처럼 새로운 아픔에 품을 내어주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진실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며 동시에 실제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치유의 길이기 때문이다.


2018년 기고글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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