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는 이 세계에서 목격한 썰 푼다.
1. 아이돌 판에 애정을 지닌 입장에서 그 산업이 소녀와 소년들을 어떻게 흡수하고 소비해왔는지를 오래 지켜봐 왔다.
2. 초창기 아이돌들은 상업성에 집중해 인위적으로 길러진 탓에 음악성이 없다며 (같은 시기 활동했던 싱어송라이터들과 비교를 당하며) 온갖 욕을 먹었었다. 물론 그들을 좋아하던 소녀팬들을 더 심한 모욕적인 언사들을 들어야 했고. 지금도 공연장 가보면 별로 달라진 거 같진 않다. 팬들이 당연히 ‘소녀’ 들일 거라는 가정하에 반말을 하는 행사요원도 봤고 질서를 안 지키는 존재로 상정하고 말을 안 들으면 쫓아내겠다느니 하는 정신 나간 공지를 하는 사전 사회자도 만나봤다. 그때 나는 이미 성인이었고 몹시 불쾌했다.
3. 어쨌든 2세대부터는 합숙소에 애들을 구겨 넣어가며 키워낸 1세대 아이돌들에게 들어갔던 투자가 본격적으로 회수되면서 대형 기획사들이 생겨나고 재투자하는 자본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수익은 주로 남성 아이돌들로부터 발생했고 당연히 보이 그룹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탐욕스러운 엔터 회사들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에 끊임없이 걸 그룹들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지속했고 혼성 그룹도 간간히 시도해봤는데 상대적으로 잘 안 터진다는 걸 확인한 시기기도 하고.
4. 3세대 이후부터는 휴덕 기간이라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후 다음 세대 아이돌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대형 기획사의 야심 찬 대표들이 지속적으로 해외시장을 노리면서 한국 아이돌 시스템은 바야흐로 월드와이드 하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방탄이 터지면서 이제는 뭐.
5. 이 시간 동안 전성기가 지나고 완전히 소진돼버린 1세대, 2세대 아이돌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만 했다. 아이돌 산업은 사실 신생 산업이기에 그들은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는데 배우로 전직하거나 뮤지컬 쪽으로 입성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은퇴해 사업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진로 선회가 이뤄졌다. 팬들 입장에서는 무더기로 계약해지하는 모습을 많이도 봤던 시기도 이때.
6. 초창기에 활동하던 아이돌 선배들의 진로를 지켜보면서 후배 그룹들은 조금 더 일찍 자신들의 커리어 패스를 계획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이제 이들은 아이돌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다른 계열에 일찌감치 도전을 하거나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스스로 작곡과 작사를 하거나 앨범을 프로듀싱하는 등 회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생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소비하고 소진된 후에는 계약 연장이 어려운 돌판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7. 2ne1이 코첼라에서 다시 모였다길래 반가워서 유튜브를 뒤져봤더니 저작권 문제로 심각하게 열화 된 팬 시점 직캠만 잔뜩 나오는 바람에 무대 감상은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이 함께 서있는 모습이 좋더라고.
8. 지금은 몇 세대인가 계산도 못하겠다만
역설적으로 회사와의 계약이 모두 해지된 이후에야 비로소 아이돌들의 진짜 민낯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회사의 관리와 버프를 털고 나와 무대 위의 사람과 아래의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 음악성도 실력도 또 다른 영역에 대한 잠재력도 이때부터는 온전히 혼자만의 몫이다.
박재범이 그랬고 신화가 그랬다. H.O.T, 젝스키스, 2ne1, 비스트, 원타임 또 더 있을 거야 더 찾아보면.
9. 화려한 대형 기획사 소속의 아티스트로서 당신들도 좋았지만 이후의 시간들 속에서도 좋은 활동 보여주길.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아이돌로서 아티스트로서.
10. 결국 팬들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나의 아이돌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