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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크모리 Apr 21. 2021

[절뚝거리는 걸음2] 평등하다는 것

소수자를 위한 서비스는 모두를 편하게 한다

2003년에서 2005년 이야기다.

내가 다닌 전북 무주의 설천중고등학교는 여름방학이 다 되어도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아니, 중2까지만 해도 교실에 에어컨이 없었다. 아이들은 7월 한여름에도 선풍기 두 대뿐인 교실에서 부채질을 해대며 수업을 들었다.

그때 난 반장이어서 조례나 종례를 해달라고 하기 위해 하루에 꼭 두 번씩은 담임이 있는 학생부실에 갔다. 학생부실 문을 열면 완전히 다른 공기가 있었다. 습도라곤 찾아볼 수 없는 쾌적하고 시원한 공기.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어서 그랬다. 학생부실에서 나와 교실로 돌아가면 다시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가득했다.


여름에 냉방뿐만 아니라 겨울에 난방도 그랬다.

수족냉증이 너무 심하고 몸이 병적으로 찼던 나는 추위에 약했는데, 12월이 다 되도록 라디에이터를 틀어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추워했고, 난 매일 송장처럼 차가운 손을 녹이느라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있어야 했다. 아이들이 '춥냐'고 물으며 내 손을 잡았다가 깜짝놀라며 남자아이들의 교복마이를 전부 벗어 나에게 덮어준 일도 있다.

그런데도 내 손발은 늘 차가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혈액순환의 문제와 저체중이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그때의 교실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 추위에 떨다가 교무실에 들어가면 따뜻한 공기가 가득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평등에 예민해지기 시작했을 때가.


'우리도 수업료 내고 학교 운영비 내는데 왜 교실만 춥고 덥게 있어야하지?'


이 생각을 더 커지게 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제주도로 떠났던 수학여행에서였다. 제주도로 출발할 땐 목포항에 가서 배를 타고 갔는데, 아이들이 머무는 객실은 넓은 공간에 언제 청소했는지 알 수 없는 초록색 카펫이 깔린 곳이었다. 조금만 걸어다녀도 양말이 까매질 정도로 더러웠던 바닥이라 4시간 동안 누울 수도, 제대로 앉아 쉴 수도 없었다. 난 이때 두 번의 뇌수술로 체력이 아주 약해진 상태여서 더 예민했다.

불편했던 4시간이 지나고, 항구에 도착해 내릴 준비를 할 때 우리학교 선생들이 우르르 나오길래 무심코 그들이 나오는 방을 봤는데, 침대방이었다. 티비에 침대가 있는 방. 그걸 보고 기가 막혔다. 수학여행비 우리도 적지 않게 냈고, 교사들은 학생들이 낸 금액에서 약간의 차액만 낸거라고 알고 있는데 왜 저들만 편하게 침대에 누워있다 나오지?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이 얘길 하니 엄마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교사들이야 나이가 많고 학생들을 챙겨야하니 쉬어야한다고 쳐도 그때의 나에겐 너무 불합리적이었다.

왜? 왜 학생들만 불편하게 있어야하지? 모두가 똑같아야지.

내가 교사가 아니어서, 안 되어봐서 그들의 입장차이는 모르겠다. 그들은 그들만의 변명, 혹은 이유가 있겠으나 난 모른다. 그냥 다른 대우, 처우에 화가 난다.


모두가 약자, 소수자에게 맞춰야한다. 이건 모두에게 좋다.

넷플릭스를 보면 자막기능이 있다. 가끔 배우들 발음이 안 들릴 때가 있어서 대사 놓치는 게 아쉬워 자막을 켜고 보는데, 이게 참 유용하다. 편과 이야기를 나누며 봐도 대사를 안 놓치게 되어 영상을 뒤로넘기지 않아도 돼서 편하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지하보도의 휠체어 에스컬레이터, 계단 옆의 경사로, 노란색 점자판이 더 많았음 좋겠다. 장애인이, 소수자가 집에서 '존재'만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어야한다. '내가 여기 있다'는 천명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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