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완벽했어, 손에 피 안 묻히고”

산티아고 가는 길 6_마흔에 또 오자, 안 되면 쉰에

by 안부

여기는 피니스테라. 스페인의 서쪽 바다.

순례자들은 여행 중 자신의 메고 있던 짐을 태워버리기도 한다.

바다를 보며 와인 한 병 마시는 게

이 여정을 마무리 짓는 상징 같은 행위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마트에 들렀다.

나는 알콜 분해효소가 없는 몸이라 잘 안 마시지만 여기서 만큼은 기분을 내보겠다며

한껏 들뜬 모습으로 와인을 골랐다.

나는 한 병, 친구는 두 병.


“호야! 너 그러다 죽어~”

나의 외침은 끝날 줄 몰랐다.

술에 취하면 달리는 택시에서 툭 내려

친구들의 애를 태웠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이유가 오늘을 위한 것이었을까.

화려한 전적이 있는 그녀의 주량은 와인 두 병.

내 몫까지 세 병을 마시니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우려스러운 마음에 바닷가를 뛰는 친구를 잡아 놓아야 했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혼자 잡아 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보이길래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며 진정시키려 옆으로 가면 꺄르르 웃으며 뛰고 더 뛰었다.


더이상 감당하기 힘들어져 숙소에 있던 남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도 땀을 뻘뻘 흘리며 20분을 같이 뛰어다닌 후에야 그녀를 진정 시킬 수 있었다.


“환장하겠네. 뭐 저런게 다 있나. 진짜 미쳤다 쟤.“


우리는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이후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곳에서 이틀을 머문 후 고심 끝에 바다가 있는 피니스테라까지 100km를 더 걸어보기로 했다.

새로운 발걸음으로 바다를 향하는 첫날

어디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사람을 만났다.


“저 사람, 어제 광장에서 봤던 사람 같은데?”

“하늘의 은총이 콤포스텔라 성당까지였나 봐. 어떻게 해.”

나체였다.

새벽 6시 어두컴컴한 골목이었지만

가로등 아래 당당히 서 있던

그의 몸을 아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신나게 온몸을 흔들며 우리에게 다가왔고,

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어릴 적 추억 덕분인지 그런 상황이 닥치면

몸이 굳고 눈물부터 나왔다.

“걱정마, 가연아! 나 태권도 했어. 나만 믿어.”


기세를 부리던 친구는 말과 달리

나와 함께 떨고 있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리고 멀찌감치 오는 프랑스 친구들과 발을 맞춰 일행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우리를 따라오다가 이내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별일이 다 있네. 그래도 우린 완벽했어!

손에 피 안 묻히고 현명하게 잘 대처했어!”


우린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기세등등하며 소란스럽게 새벽 골목을 웃음소리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친구에게 이 길에 왜 올라서게 되었냐고 물었다. 한 달 넘게 동행하면서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3년 전 아버지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한 게 끝내 한이 되었다고 한다. 떠나시기 전 자신에게 전화를 했지만 업무 처리하느라 못 받았다.

열일 체쳐두고 그 전화를 받았으면.

마지막 목소리라도 들어봤으면.

친구처럼 지내던 아버지였기에 더 기가 막히고 슬펐다고 한다. 그래서 3년 동안 끊임없이 자책하며 질문했다고 했다.

그렇게 맞닿은 우리의 스물일곱.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대체 우리의 스물일곱의 해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왔을까. 친구는 단순히 삼재였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보니 내 인생에서 이 친구를 만나게 된 일.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일은

어쩌면 머나먼 미래의 나에게 닥칠 일에 대해

예견 해준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린 너무나 닮아있었고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더욱 놀라운 일들이 많을 것을 보여주었다.

“호야 넌 여기 다시 올 거야?”

“너랑 약속했잖아. 10년에 한번씩 오기로.”

우리는 마흔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지만, 지금 친구는 8살 아이를 키우고 있다.

육아로 인해 참여가 어려우니 아쉬움에 혼자라도 다녀오라 한다. 다시 길을 나서는 일이 두려웠던 나는 시간을 벌었다.


“너를 두고 혼자 갈 수 없지! 우리는 쉰 살에 같이 가면 되니까 괜찮아.”


아는 맛이 무서워서 피하고 있지만, 종종 날씨가 좋아 하늘을 볼 때, 어디선가 산티아고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짐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탈히 만나길 바라는 나의 쉰 살.


다시 만나게 될 산티아고 길 위에서 재회를 생각하면 그 친구의 존재는 고맙고도 감사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랑 걸을래? 헤어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