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가는 길 5_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장 올라보고 싶었던
철의 십자가 앞에 서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 걱정했지만,
얼마 못 가 옷이 다 젖고 나니 오히려 걱정이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시작부터 언덕을 오르고 또 올라
결국 산의 정상에 닿았다. 십자가 앞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작은 사진, 기도문, 편지가 가득했다.
이날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주머니에서 정성껏 준비해 온 것들을 꺼내놓았다.
나도 준비해 간 작은 돌에 기도가 필요한 이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놓았다.
한국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작게나마 보답할 수 있다는 마음에 기뻤다.
그 순간을 담아 사진을 찍었고,
바로 프로필 사진으로 바꿔두었다.
잠시 후, 명단에 없던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왜 내 이름은 없어?”
“지금은 기도가 꼭 필요한
아픈 사람들 위주로 썼어.”
“유아인이랑 지드래곤도 아프대?”
“응. 마음이 많이 아플 거야.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게 쉽진 않으니까.”
괜히 사진을 올렸나 싶었다.
서운하다는 연락이 몇 개 더 왔다.
다행히 며칠 후, 다시 만난 길목에서 또 하나의 기도 공간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몇 안 되는 지인들의 이름까지 빠짐없이 적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프로필 사진도 바꿨다.
나는 인간관계가 서툴러 소수의 지인과 가족만 곁에 두고 살아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다양한 국적과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딘가에서 “뷰티풀! 뷰티풀!”을 외치는 소리에 돌아보니 하얀 백발의 어머니와 아주 예쁜 딸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지팡이가 있었다. 딸은 앞이 보이지 않는 엄마와 지팡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의지하며 걷는다고 했다.
그날따라 하늘이 유난히 새파랗고 예뻤다. 우리는 함께 하트 모양 구름도 찾아냈다.
연신 “뷰티풀”을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앞이 보이지 않는 엄마였다.
“새 소리랑 바람 냄새가 너무 좋아서 외친 거야.”라며 웃던 그는, 이곳에 와서 모든 걸 이룬 것 같다고 했다. 모든 순간이 완벽하고 황홀하다고.
그 해맑은 표정과 음성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새벽에 길을 나섰을 때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몇 년 전 은퇴 후 처음 순례길에 왔다가 지평선과 예쁜 하늘에 반해, 남편이 10년간 매년 오자고 약속해서 지금 세 번째 순례 중이라고 했다.
“내가 여길 왜 또 왔는지 첫날부터 후회막심이야.”
“이렇게 힘든 데를 열 번이 나요?”
“여기가 그래. 지금은 죽을 것 같지만,
집에 가면 또 이 길이 그리워서 설레.”
이 부부를 11일째 아침에 만났는데,
그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이곳을 몰랐으니 왔지, 알았더라면 절대 안 왔을 거라며 혼잣말처럼 소리쳤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해야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마다,
“책임지자. 지금 돌아가면 창피하잖아.”며
나 자신을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야, 이번은 서른 기념이니까
마흔에 한 번 더 올까? 우리도 10년에 한 번씩?”
“그러자! 나쁘지 않지 뭐.”
우리에게도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여정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묘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또 걷고 싶어졌다.
걷는 게 죽기보다 싫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던 내가,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처음엔 고개조차 들지 못했어도,
어느새 오후만 되면 노래를 부르고,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너희 어디 잘못된 거 아냐? 안 힘들어?
왜 뛰어다녀?”
함께 걷던 외국인들이 놀란 눈으로 물어왔다.
사실 나도 처음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쟤네는 힘들지도 않나? 어떻게 저렇게 매일 밤마다 파티를 하지?’ 하고 놀랐다.
알고 보니 술기운이라도 빌려야 걷는 게 가능하다고, 그저 생존을 위한 술판이었다.
가장 힘든 시간인 오후 1시부터 목적지까지, 우리는 뛰어다녔다. 며칠 전만 해도 오후만 되면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돌밭과 흙, 달팽이만 보며 걷던 우리였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어떤 친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전부터 너 뒤에서 봤는데, 너무 힘들어 보여. 이거라도 먹어봐.”
그가 건넨 건 근육 이완제였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물까지 건네주며 꼭 먹으라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는 웃고 떠들며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걷고 있었다.
한편, 구석에서 한숨을 푹푹 쉬던 미국인이 있었다. 여길 너무 오기 싫었지만 여자친구가 함께 걷지 않으면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해서 억지로 왔다고 했다. 투덜대긴 해도 정작 그는 여자친구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 짐을 챙기고,
식사를 준비한 뒤, 가장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깨웠다. 혼자 있을 땐 투덜대던 그가 그녀 앞에서는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신 70대 할아버지도 만났다. 겉보기엔 5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순례길을 23일 만에 완주했다며 자랑하셨다.
보통 40일 정도 걸리는 길이라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칭찬했지만, 나는 조금 갸웃했다.
‘이 길을 그렇게 빨리 걸어서 뭐 하시려고…?
천천히 걷고, 자신과 대화하며 돌아보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물론, 그건 나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산티아고 길? 나 23일 만에 다녀왔지!” 하고 자랑하고 싶었을 테니까.
유난히 단체로 온 한국인들도 많았다.
짐은 우버로 보내고, 물 한 병과 지갑만 들고 걷는 사람들. 숙소는 여행사에서 미리 예약해 두었다. 순례자들이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조금만 늦게 도착하면 자리가 없어 다음 마을로 이동해야 했다. 이동 거리만 최소 10km 이상. 불편은 결국 순례자들의 몫이었다.
숙소의 기본 룰조차 무시되는 일도 많았다.
입실 순서대로 2층부터 채워야 하는데,
한국인 단체는 편한 1층 침대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그로 인한 분쟁도 생겨났다. 싸우는 일이 거의 없던 이 길에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장면이 종종 보였다.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일본인 할아버지는 매년 여름, 일주일간 휴가를 내어 이곳을 걷는다고 했다. 벌써 5년째라 했다. 40일을 내야 한다는 부담에 친구는 정년 후에나 와야겠다고 했는데,
이런 방식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조각조각 모아 완성해 가는 것,
어쩌면 그게 더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꼼포스텔라 성당에 도착했다. 그냥 바닥에 누웠다. 광장에 드러누워 남들 다 찍는다는 ‘발사진’도 찍고,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저녁이 되자 미사가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거대한 향을 피우는 의식이었다. 알고 보니 수백만 원의 기부자가 있을 때만 열리는 특별한 미사였다. 거대한 향이 흔들릴 때마다,
오랜 여정을 걸어온 시간들이 향처럼 천천히 마음속을 감쌌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 길은 목적지가 아니라,
매일매일 마주했던 작은 순간들이 전부였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