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한 짠돌이가 내놓은 4,000만원
우리 삼남매, 언니와 오빠는 연년생이라 늘 붙어 다녔고, 사소한 이야기도 척척 통하는 사이였다. 오빠와 나 사이엔 세 살 터울이 있었지만, 거리는 훨씬 더 멀게 느껴졌다. 둘만의 세계가 분명했고, 나는 늘 그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의 오빠는 내게 낯설고 조금은 서먹한 존재였다.
나는 병을 앓으면서 조금씩 오빠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퇴원하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오빠는 암 환자가 지켜야 할 수칙과 식단, 생활 습관 등을 정리한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자료를 모은 정성이 느껴지는 파일이었다.
“꼭 읽고, 이대로만 하면 반드시 나을 수 있어.”
손이 많이 가고,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던 오빠였다. 그 순간 처음으로 듬직하게 느껴졌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속엔 누구보다 큰 걱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가족들에게 내 상태를 담담히 전했을 때도, 오빠는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이 모아두었던 4,000만원을 내놓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짠돌이 오빠가 그럴 리 없다니까!”
믿고 싶지 않았다기보다, 믿기 어려웠다. 오빠의 마음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엄마, 거짓말 하지 마. 오빠가 그럴 리가 없어.”
“진짜야. 통장을 떡하니 내놓고, 네 병원비로 다 써도 된다고 했어. 나도 놀랐어.”
“그건 엄마가 돈 있으니까 액션만 취한 거야. 그 짠돌이가 정말 없으면 내놨겠어?”
엄마의 감동을, 그렇게 나는 농담처럼 던져버렸다.
퇴원 후 집에서 오빠와 단둘이 남게 된 날, 출출한 김에 치킨을 시켜 먹자고 했다. 오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쫌생아, 치킨 한 마리 사주는 게 그렇게 아까워?!”
툴툴대며 짜증을 냈지만, 오빠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기름진 음식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엉뚱한 데 화를 냈다. 어쩌면 내 안의 불안과 답답함을 풀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치킨을 시키자, 오빠는 말없이 식탁에 마주 앉아 튀김옷을 조심스레 벗겨냈다. 바삭한 껍질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고운 속살만을 골라 내 앞에 놓아주었다.
“이것만 먹어. 더 먹으면 몸에 해로워.”
조심스러운 손끝에서 오빠의 마음이 전해졌다.
어릴 적 오빠는 언니보다, 그리고 나 보다도 훨씬 여린 아이였다. 여자들 틈에서 자라서였을까. 엄마는 가끔 “둘이 성별이 바뀌어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하곤 하셨다. 가만히 치킨 속살을 발라주는 오빠의 손길을 바라보다가,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급식이 없어 우리는 도시락을 싸야 했다. 엄마는 24시간 근무 후 하루를 쉬는 고된 일을 하셨고, 엄마가 없는 날의 도시락은 늘 걱정거리였다. 그 걱정을 책임진 사람이 바로 오빠였다. 엄마가 반찬을 미리 해두고 나가시면, 오빠는 새벽마다 밥을 지어 도시락 네 개를 쌌다. 언니 두 개, 내 것 하나, 자기 것 하나. 그때 오빠의 나이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그 시절 모습이 지금과 겹쳐지며, 문득 눈물이 났다. 새벽마다 일어나 도시락을 싸는 일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런데도, 어떻게 한 번의 불평도 없이 오빠는 그걸 다 해냈을까.
“오빠는 언니도 있는데, 왜 도시락을 싸기로 한 거야?”
“그냥, 누나는 새벽에 등교해야 하고, 너는 너무 어리고,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안 힘들었어?”
“뭐가 힘들어. 그냥 있는 반찬에 밥만 새로 하면 되는데.”
오빠는 그런 사람이다. 평생을 힘들다고, 왜 자기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불평 한 번 안 해본 사람. 지금도 주말 없이 일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한다.
“진짜 괜찮아. 회사 가서 쉬면 돼.”
어느 날은 병원에 가는 길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두세 번씩 버스를 갈아타는 건 몸보다 마음이 더 지치는 일이었다. 나는 엄마와 합의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면역력이 약해서 대중교통을 타면 위험할 수도 있어서, 차를 한 대 사야겠어.”
엄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그래, 그래’ 해주던 시기였다. 우리는 차를 고르기로 하고, 매장에 갔다. 옵션이 뭔지도 모르면서, 딜러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꼭 차 안에서 고개 흔드는 강아지 인형처럼. 그렇게 계약을 하고 나와 서로를 껴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가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시 뉴스에서는 운전 중 졸도해 사고로 이어지는 일이 자주 보도되던 때였다. 모두 걱정했고, 오빠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5년 동안 재발 없이 완치되면, 내 차 줄게.”
“5년 후? 지금 아니면 무슨 의미야? 그리고 그게 말이 돼?”
오빠는 자신이 1년밖에 타지 않은 차를, 5년 후에 내게 주겠다고 했다. 그 차는 오빠가 주말마다 세 시간씩 닦던, 말하자면 그의 자부심이자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그런 차를 선뜻 내게 주겠다고 했다는 사실은, 그가 통장을 내밀었을 때보다 더 놀라웠다.
나는 오빠를 너무 오래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뚝뚝하고 짠돌이 같던 그 사람은, 알고 보면 조용히 제 몫을 감당하며 우리 가족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중심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도시락을 싸고, 통장을 내어놓고, 치킨 껍질을 벗기던 손길 속엔 늘 말 없는 사랑이 있었다. 이제는 안다. 오빠는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일 뿐,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여전히 주말마다 세차를 한다. 그 차를 나에게 줄 일은 아마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