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800km를 걷지? 4일만 견뎌봐요

산티아고 가는 길 3

by 안부

처음 마주한 숙소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성당을 개조해 순례자들의 숙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살면서 단체생활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한 공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우와! 대체 침대가 몇 개야?”

“그러게, 궁금하긴 하다. 내가 한번 세어볼까?


2층 침대 120개가 세 줄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숙소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쳐 있을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마치 각국의 왕 수다쟁이들만 모여 있는 듯 시끌벅적, 시장통 같은 분위기였다.

어떤 이는 내일을 위한 짐을 싸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자신들만의 작은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

복작복작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샤워를 마친 뒤 짐을 정리하고 있다.

어디선가 성당에서 미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성당 안 가?”


이 길을 걸으며 기회가 되면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한 친구는

종소리가 들리자 성당에 가보라며 챙겨주었다.

순례길을 걷는 내내 미사를 챙겨준 건 비신자인 친구였다.

하루쯤은 그냥 누워 있고 싶었던 날도 있었지만, 친구의 발길질에 못 이겨 억지로 일어나

성당에 간 적도 더러 있었다.


새벽이 되자 시끌시끌한 소리에 눈이 떠졌다.

아직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모두가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제도 겨우 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오늘은 어떡하지?’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새벽녘에 나선 우리를 찬 공기와 어둠이 맞아주었다.

가로등이 있는 마을을 빠져나와 산길로 접어들자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머리에 있는 랜턴을 켜고 걷기 시작했다.


새벽 6시에 출발해야 다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일찍 길을 나선 것이다.

그렇게 2시간쯤 걸었을까,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졌다.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이곳에 온 걸 텐데, 매일 이런 순간을 놓치고 있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호야, 다음에 오면 우리 8시부터 걸어보자. 이렇게 놓치는 게 너무 아깝잖아.”

“너 또 오게? 나는 다시 올지 잘 모르겠어~ 사실 그냥 동네 길 산책하는 거 같아.”


한라산 자락인 1100고지 밑에 살고 있는 제주도 친구는

이곳의 자연 풍경에도 큰 감흥이 없다고 했다. 자기 동네 길과 다를 바 없다는 듯이.

어떤 이는 이런 지평선을 한국에서는 볼 수 없어 왔다고 했지만,

친구는 도무지 공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마을 축제 기간 여행객들로 숙소가 가득 차서

다음 마을로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바닥이 젖어 있든, 똥밭이든 전혀 상관없었다. 드디어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머물 곳은 없었다.

결국 다른 일행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탔다. 다음 마을로 이동해 겨우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맞이하기 싫은 아침은 금세 찾아왔다. 하루만, 온종일 누워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어제 지나친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마을을 건너뛰지 않고 걷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차 타고 가면 20km가 15분밖에 안 걸리는데’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킨 채 짐을 꾸렸다.

3일 차가 되자 몸은 더 천근만근, 발바닥은 붓고 발가락 사이 물집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발가락 양말 위에 등산 양말까지 신어 발을 보호하려 했지만,

오히려 과했는지 남들보다 물집이 두 배 더 생겼다. 가방 무게도 감당이 안 되어 계속 가방을 벗어 던졌다.

없는 자리도 만들어 쉬어갔고, 어디든 자리가 눈에 띄면 몸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800km를 걷지? 나 잘못 온 거 같아.’


이 속도면 3달이 걸려도 완주는 커녕 절반도 못 갈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5일 차가 되자 거짓말처럼 가방 무게가 덜 느껴졌다.

20분마다 던지던 가방을 메고 한 시간을 걸어도 괜찮았다.

며칠 더 지나고 나서야 해가 뜰 때까지 2시간을 걷는 동안

가방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게 경이롭게 느껴졌다.


‘나도 할 수 있구나. 내가 포기만 안 하면 되는 거구나.’


힘든 내색 없이 걷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이렇게 아침마다 울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왜 괜찮을까?’


하며 수없이 나를 되돌아보았다. 어릴 적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안 해도 되는 고생을 자처하는 애야. 좀 편하게 살아.”


그러게, 어른 말씀 좀 들을걸.


‘여길 왜 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을까. 너무 힘들다. 이러다 재발하는 거 아냐?’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 병은 재발률이 높다고 해서 우려가 많았다.

여행을 떠나는 내게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묵주 팔찌와 편지를 보내준 친구가 떠올랐다.

나와 같은 병을 앓았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친구는 편지에 이렇게 말했다.


“너의 용기는 대단해. 하지만 굳이 한계를 시험하고 오지 않아도 돼.”


당부와 응원의 말을 남겼고, 어쩌다 환우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멀쩡해 보여도 우리는 멀쩡한 사람들이 아니야. 그 독한 항암을 그렇게 많이 했잖아.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처럼 다 누리고 살 수 없어.

일도 하면 안 되고, 오로지 몸만 생각하며 조심히 살아야 해.”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어찌 보면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당연했다.

그동안의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게 맞다 생각했지만, 관리를 철저히 해도 재발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다.

그래서 정답이 없구나 싶어서 이런저런 관리도 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좀 이상한 아이였다. 좀처럼 암 환자의 룰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트에 가면 다들 유기농 제품 앞에 서 있었지만 나만 일반 매대에 서 있었다(옆을 돌아보니 곁에 아무도 없었다). 치킨을 먹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반응했지만,

내가 항암 후유증으로 인해 미각과 후각을 잃었을 때도 가장 많이 먹은 건 엽떡(매운 떡볶이)과 치킨이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 이 시간을 충분히 즐겨보자.’


내게 온 병은, 그냥 지나가는 감기 같은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혼자 물었다.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호전되는 상황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미래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나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는 말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그게 결국 우울함으로 이어졌다.

우울의 늪에 빠지기 싫었던 나는,

남은 생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 떠난 여행이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밀려드는 불안감은, 나조차 어찌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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