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낳는 일만큼 '소신'을 가져야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이만큼 컸네. 다 키웠네, 다 키웠어.
안 낳으니까 안 크는 거여.
어린이집 하원 하는 길에 같은 원에 손자를 데리러 오신 할머니와 몇 마디 나누었다. 둘을 키우는 엄마를 응원해준다고, 혹은 외동으로 자라고 있는 본인 손자가 안타까워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안 낳으니까 안 크는 거' 과연 틀린 말은 아니다. 낳았으니 컸지. 그러나 두 번째 임신 이후 뱃속에 있던 그 아기가 무려 23개월이라는 삶을 차곡차곡 쌓아 이만큼이나 자라기까지 깜깜한 세월을 살아온 지난 시간을 셈 해본다. 아이가 이만큼 자라기 까지 상당한 값을 치렀다. 세상에 절대 공짜는 없다면서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애들은 낳아 놓으면 큰다' 하시더라. 어르신 말씀에 구태여 나의 모든 감정을 다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 웃으며, '그러게요 많이 컸어요' 한다.
아들은 예민하다. 요즘은 등원할 때는 딸이 원해서 아들을 먼저 어린이집에 등원한 후, 누나가 등원을 하지만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최대한 늦게 등원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하원 했다. 그렇게 3개월 넘는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오랜 인내 끝에 아들은 완벽하다는 표현이 이거다 싶을 정도로 어린이집 생활을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이제 등원을 누나보다 먼저 하는 것을 오히려 즐겁게 여길 정도다.
아이구, 둘이 있으니 얼마나 예뻐.
요즘은 점점 둘 낳는 일이 드물다 보니 자주 듣는 말이다. 이제는 아이가 둘이라서 듣는 모든 말들을 좋은 말들로 여기며 훌훌 날려 버릴 수 있다. 둘째는 이번 달, 두 돌이 된다. 둘째가 24개월만큼 자라서야, 드디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돌 이후부터 올해 3월이 되기 전까지 아이를 이제 오전 시간만이라도 어딘가에 맡겨봐야 하나 하루에 수십 번씩 고민도 했었다.
그러하다. 한 아이를 낳고 둘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엄마들은 종종 묻기도 한다.
하나는 일상, 둘은 지옥이야.
아이를 하나만 키울 때, 감정과 생각이 고갈된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이가 잘 때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퇴근 후 돌아오는 남편이 '어느 정도'의 집안일을 함께 한다면 문제없었다. 가장 큰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두 아이는 다르다. 퇴근 후 돌아오는 남편이 '어느 정도' 함께 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했다. 넘쳐나는 집안일,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 두 아이의 끼니를 챙기는 것, 아이 둘을 씻기고 재우고, 놀아주고, 안아주기 두 아이에게 필요한 일상을 엄마 한 사람의 힘으로 채워주기는 불가능했다. 늦게까지 일 하고 들어오는 남편이 할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었다. 아이가 낮잠을 잘 때 쉴 수 있는 날과 시간을 손에 꼽을 정도가 되면서 쉽게 고갈되고 지쳤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더라도 지독한 스트레스가 없다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딸이 하원한 이후다. 두 아이의 각각 다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첫째가 놀아달라고, 책을 읽어 달라고 할 때 둘째는 분유를 먹거나 자야 했다. 둘째가 좀 커서 6개월쯤 되니 작은 아이가 밥을 먹을 때 큰 아이는 꼭 응가를 한다 했다. 밥을 먹다가 끊긴 둘째는 더 달라고 울었고, 첫째는 응가할 때 엄마가 같이 있어주길 늘 원했다. 둘째는 이제 잘 시간이거나 몸이 좀 피곤하니 안아달라 하기 시작할 때 첫째는 역할놀이를 원했다. 그래서 오후 8시 30분 이후부터는 아들을 아기 띠에 메고 온 집을 누비며 로보카 폴리의 로이가 되어 충실하게 화재진압을 해내야 했다. 이도 저도 안될 때는 아들 재울 준비를 빠르게 마치고 아이를 안아서 재우는 동안, 딸은 텔레비전을 봤다. 아들이 빨리 잠들지 않을 때는 텔레비전을 혼자 보는 딸이 몹시 안쓰러워 예민한 아들이 미워지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 십 번, 수 백번 일상과 지옥을 오가길 반복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요즘도 엄마들은 종종 묻는다. "그래도 둘 있으니까 좋지? 둘째가 그렇게 예쁘다며? 아이가 둘이니 어때? 둘째는 사랑이라며?" 그럼 웃으며 말한다.
"아이가 둘인데, 누가 더 예쁘고 말고 가 없어요. 둘 다 불쌍해요. 웃긴 건, 둘 다 불쌍한데 셋 중에서는 제가 제일 불쌍합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아들이 태어난 지 2년이 되어가는 요즘. 이제 엄마는 여유가 생겼고, 두 아이도 웃는다. 아들은 일찍부터 반찬과 국을 먹기 시작했고, 손위 형제가 있다 보니 말과 행동을 빠르게 익혔다. 먹는 것을 일일이 쪼개지 않고 줘도 잘 먹을 수 있고, 분유를 먹을 일이 없어지니 확연히 일거리가 줄었다. 아이는 말을 점점 잘 알아듣게 되니 기다리는 일을 불안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꼭 놀아주지 않아도 둘이 놀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아들이 어떻게 커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들이 이만큼 자라는 동안 딸의 얼굴도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 이제 두 아이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 둘은 23개월 차이가 나는 남매로, 둘의 생일은 딱 700일 차이가 난다. 너무 적은 개월 수 차이는 우리 셋을 더욱 깜깜하게 했다. 남편은 퇴근이 늦는 편이고, 아이들은 어렸다. 그래서 지나온 시간을 더욱 깜깜하고 길게 느꼈는지 모른다.
두 자녀의 터울에 대한 고민은 둘째를 가지려는 엄마들에게 여전히 큰 고민이다. 맘카페에 고민 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정해진 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고, 임신이라는 게 아이를 가져야지 한다고 해서 모두가 늘 쉽게 되는 것도 아니라 꼭 계획한다고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너무 일찍 아이를 갖게 되고, 때로는 첫째는 쉽게 임신이 됐었는데 너무 늦게 아이를 만나게 되거나 혹은 둘째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접한 정보에는 엄마의 신체적, 심리적 안정을 위해 네 살 터울을 권하더라. 23개월 터울 두 아이를 키워보니 남편의 가사, 육아 참여가 아주 활발하다면 터울이 적은 두 아이를 육아하는 게 엄마의 미래를 위해 좀 나을까 싶으나 그렇지 않다면 권하지 않는다. 여기서 포인트는 남편의 퇴근 후 귀가 시간이 몇 시인 가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다. 두 살 터울인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이제야 모두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점은 수준이 맞아 같이 놀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온다는 것. 동네에서 만난 30개월 즈음부터 그 이상 차이나는 엄마들의 고민은
둘이서 안 놀아요
라니, 출산 후 당장은 좀 깜깜해도 이미 낳아서 이만큼 자란 두 아이를 볼 때면 잘된 건가 싶다. 그러다가 2분마다 싸우는 둘을 말리면서 다시 드는 생각은 '둘이 놀면 뭐하나'라고.
엄마, 딸, 아들 셋이서 나란히 길을 걸을 때면, 두 아이가 손 잡고 걸어가니 그만 너무 귀여워서 아이들의 나이를 대화 중에 서로 맞춰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칭찬 격려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다 감사하고, 모두 괜찮지만 듣기 싫었던 덕담은
셋째
이런 조언 및 덕담하신 분이 있었다. 한 명 더 낳으라고 쉽게 이야기하신 그분. 성품이 친절하신 데다, 더우나 추우나 아파트 관리 일에 최선을 다해 주시는 경비 아저씨. 그래서 이 역시 웃으며, "아니에요, 지금도 너무 힘들어요"하고 넘겼지만, 얼굴을 마주 보니 인사도 할 겸 여러 번 반복해 건네는 그 말이 듣기 좋은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나보다 어른 하는 말씀이니 싫은 소리 좋은 소리, 모든 말들 그냥 넘기지만 도를 넘는 참견은 상대방의 정신 건강에 해롭다. 다행히 올해 2월 이사를 하게 되어 이제는 듣지 않게 되었다. 이런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꼭 하시는 말씀 중, 나라 인구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신다. 그러나, 애국은 셀프다. 자녀가 하나이든 둘이든 혹은 자녀계획이 없다고 하더라도 키워 줄 것 아니라면 필요 이상의 참견은 제발 그만.
말랑한 육아인듯한 느낌의 인스타, 현실은 무척 하드 합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