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 May 16. 2016

라이프 오브 파이

생존과 종교, 소년과 호랑이 그리고 우주

라이프 오브 파이


난 키에르케고르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았음을 인정해야 될 테고 ... 난 상처 입은 겸허한 진실을 고수하기로 했다. P8


시민들이 예술가들을 후원해주지 않으면, 우리의 상상력은 극악한 현실의 제단에 희생될 것이다. 결국 예술가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고, 쓸모없는 꿈을 꾸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P12


놈들은 너무 느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다. 잠과 게으름 덕분에 재규어와 스라소니, 큰수리, 아나콘다에게 먹히지 않는다. P15


야생동물들은 공간도 시간도 자유롭지 못하고, 관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P29


야생의 영역은 취향 때문이 아니라 필요 때문에 넓다. P30


사람의 집은 기본 욕구를 가까이서 안전하게 해결해주는 영역 안에 있다. 동물원은 동물에게 마찬가지 역할을 해준다. P31


어느 쪽이든 우리는 동물을 보면 거울을 본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보는 강박관념은 종교학자 뿐 아니라 동물학자에게도 독인 것을. P48


동물은 '다른 곳으로'가 아니라 '뭔가로부터' 달아난다는 사실이다. P60


그 동물들은 그들과 안전지대로 여기는 곳 사이에 끼어드는 대상에게만 위험할 뿐, 다른 것은 해치지 않는다. P61


사회적으로 열등한 동물이 주인과 사귀기 위해 가장 끈질기게 노력한다. 그들은 주인에게 가장 충직하고 가장 필요한 동반자임을 증명해 보인다. P65


개인의 영혼은 세상의 영혼에 닿는다. 마치 우물이 지하 수면에 닿는 것처럼. 생각과 말이 닿지 못하는 우주를 지탱하며, 우리의 중심 안에서 드러나려 애쓰는 그것은 같은 것이다.  P70


그는 세 시간 만에 신음하고 숨을 헐떡이고, 서글퍼하며 죽어간 신이다. (중략)
사랑, 마틴 신부는 그렇게 말했다. (중략) 난 계속 크리슈나 신을 붙들고 있을래요. 크리슈나의 신성에 훨씬 마음이 끌리니까. 신부님은 땀을 줄줄 흘리고 말도 많은 하느님 아들을 계속 붙드세요. (중략) 기독교는 급히 서두르는 종교다. 이레 만에 창조된 세상을 보라. 아무리 상징적이라고 하지만, 창조는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P74


이슬람교란 단지 쉬운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두인족이 하는 뜨거운 날씨 속의 요가. 힘들이지 않고 천국에 가겠네. P77


두 쿠마르 씨는 인도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의 선지자들이었다. P86


땅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며 모든 것이 똑같이 신성하다는 점을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 좋은 기도 카펫 아닐까. P107


우린 우연히 동물을 많이 가진 가난한 가족이었다. P110


캐나다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먼 거리로 따지자면 북아프리카의 팀북투와 다를 바 없는 나라였다. P111


놀라울 정도로 적응을 잘하는 동물들이 있다. 모두 인간처럼 된 동물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P119


사자 새끼는 어미가 개란 걸 알면 겁이 나서 졸도할 것이다. 어미가 없어질까봐. P120


어리고 피가 따뜻한 것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란 어미가 없는 것이니까. P120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을. P127


나는 태평양 한가운데 고아가 되어 홀로 떠 있었다. 몸은 노에 매달려 있고, 밑에는 상어가 다니고, 폭풍우가 몸 위로 쏟아졌다. P144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명민하고 배반 잘하는 적이다. 관대함도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접근해, 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공포심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 P208


리처드 파커를 길들여야 했다. 그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문제나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나의 문제였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또 비유적으로도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중략)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주었다. P212


비슈누가 자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가 우주 전체를 본 현자 마칸데야 같은 기분이었다. P226


목구멍이 엄청난 분홍색 동굴이야. 입 속의 노랗고 긴 종유석과 석순 좀 보라구. 오늘 동굴구경이나 가야겠네. P229


한데 사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아주 단순하고 잔혹하다. 인간은 무슨 일에든 익숙해질 수 있다. 살해행위라 할지라도 P237


죽어가는 만새기의 몸이 카멜레온처럼 변하던 광경을 되새기자 마음이 환해졌다. P237


책자에는 손에 들어온 거북이 다 내 것은 아니라는 내용이 빠져 있었다. P250


호랑이는, 아니 모든 동물은 우위를 가리는 수단으로 폭력을 쓰려 하지 않는다. 동물이 맞붙어 싸울 때는 죽이려는 의도가 있는 경우고, 이때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잘 안다. 충돌에는 큰 희생이 따른다. P263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P266


상반되는 것 중 최악은 권태와 공포다. 우리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다. P275


내가 동물처럼 먹어댄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 아팠던 날, 내가 얼마나 밑바닥까지 추락했는지 분명히 알았다. 시끄럽게, 정신없이, 늑대처럼 먹어대는 내 모습은 리처드 파커가 먹는 모습과 똑같았다. P285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 손에는 나와 죽음 사이에 남은 모든 것이 쥐어져 있었다. 마지막 오렌지색 호루라기. P290


오렌지색은 희끄무레하게 변했다. 매끈하던 것은 거칠어졌다. 거칠던 것은 보드랍게 변했다. 날카롭던 것은 뭉툭해졌다. 온전한 것은 넝마가 됐다. P302


한낮에는 환한 희망을 주는 해초였지만, 이제는 밤이 저지르는 배신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P358


상황이 좋을 때는 기분이 처지고, 상황이 나쁠 대는 기운을 낸다. (중략) 하지만 파도 하나를 정확한 지점에서 타넘은 덕분에 높아졌다 부서지는 물살을 따라 육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P360


그는 오른 쪽에 있는 내 앞으로 똑바로 지나갔다.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몇 미터쯤 해안을 뛰더니 방향을 돌렸다. 균형을 잡지 못해 뒤뚱뒤뚱 걸었다. 리처드 파커는 몇 차례 넘어졌다. 밀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가 내 쪽으로 방향을 틀 거라고 확신했다. 날 쳐다보겠지. 귀를 납작하게 젖히겠지. 으르렁대겠지.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매듭지을 거야. 그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밀림만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함께 겪으면서 날 살게 했던 리처드 파커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P361







오랜만에 즐겁게 읽은 소설. 오래 전에 e북으로 사뒀다가 읽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브런치를 하게되면서 다른 작가들의 수려한 글들이 대단하게 생각되어 자투리 시간을 쪼개 읽었다. 비록 시작은 문장력을 위해 소설을 읽어보자는 생각이었으나, 마지막은 소년 파이와의 227일 표류를 무사히 마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 정도로 좋았다.


책을 오래 전에 사둔 이유는 영화를 인상 깊게 봐서다. 영화를 보고, 책을 바로 봐야 비교가 되는데 영화를 보고 한참을 지나 책을 사두고 다시 한참 지나 책을 읽어서 영화와 상관없이 새롭고 신선하고 재미있는 건 별 수 없다.


책으로 읽으면서 오래 곱씹고, 다시 되씹어서 마음이 꽉 차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기억에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 자체로 모험이며 환상이었다. 엄청난 영상미가 있는 작품이라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책은 다른 몰입감을 준다. 읽는 내내 영화보다 더욱 절실해진다. 


삶에서 종교가 필요없다고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실제로 종교가 없어도 별 문제 없는 이들도 세상에는 많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파이는 종교 덕분에 살았다. 그의 생존에 필요했던 것은 물과 먹을 것, 호랑이, 그리고 기도할 대상이었다.


영화를 본 이후에는 호랑이를 무의식, 파이를 자아로 생각해 블로그에 글을 적었다.

http://soulfood-dish.tistory.com/74


책을 읽을 기념으로 브런치에는 생존과 종교에 대해 적어두고 싶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 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 삶에 대한 절망, 살고싶은 욕심, 오랜 시간 나를 살아있게한 누군가와의 이별이 이 한 권의 책에 모두 있다니 대단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이트의 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