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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Jul 20. 2016

엄마, 여자, 그리고 자아

04 엄마, 엄마도 사람입니다만



가끔은 육아 기계인가 싶다. 어떨 때는 가슴 한가득 생명에 대한 경외감에 벅차오르다가 푸쉭하고 바람이 빠져버리기도 한다. 한껏 울어 젖힐 때면 소리를 빽 지르고 싶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까꿍 놀이를 하며 세상에 둘도 없는 함박 미소를 날리는 너를 보면 나도 그냥 웃어버릴 수밖에.


낮 수유를 끊으며 수면 패턴이 달라진 아기 덕에 한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8월이면 돌잔치라 크게 준비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쫓기는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인지 성격 탓인지 모를 일. 그래, 난 요즘 엄마다.


여자. 여자이길 바랬던 시간은 서른 해를 지나는 동안 모두 더해봐야 3년 정도. 나머지 27년, 28년의 시간은 대부분 형체가 불분명한 성공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었다. 알면서도 마음에 와 닿지 않던 생각, 오늘이 가장 젊고 아름답다는 것. 출산 후 종일 아이 뒤만 쫓아다니던 어느 날 불현듯 그 말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와 닿는다. 어느날 거울 앞에 서서 축 늘어진 살들을 갖게 된 나를 보고 그제야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오늘이 가장 아름답다


할 수 있다면 자신감을 갖고 가꿔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생각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싶지만, 워낙 편한 것들을 쫓아 버릇해서 오늘도 헐렁한 티를 대충 입고 집을 나선다. 그럼에도 요 근래 들어 엄청난 확신을 갖게 된 '오늘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나의 생각은 내일도 여전할 것이다. 헐렁한 티에 헐렁한 바지, 아기띠를 들춰맨 나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요즘은 그 아기띠가 없다면 울퉁불퉁 튀어나온 뱃살이 머쓱해지는 나라 해도 그렇다. 치장은 대충 그린 눈썹과 급하게 바른 선크림이 전부라 하더라도 그렇다. 여자로 불리기보다 엄마로 불리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이 때라서 다행이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여자와 엄마의 거리가 제법 멀어 보였지만, 아기띠와 한 몸이 되어야 뱃살이 가려지는 요즘은 둘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


'나'라는 존재의 행방, 아무리 엄마라지만

여자도 엄마도 아닌 '나'였으면 해서 쓴다. 최근 한 달은 그나마 무어라도 적지를 못해서 더욱 텅 빈 기분이 많이 들었다.


아무리 엄마라지만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잊는 건 무기력을 부른다. 생각해보니 내가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게 되는 것, 내 생활에 '나'의 흔적이 없어서 문득 힘들어지는 것 모두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누군가를 위해 하루 온종일을 온전하게 쏟아본 적 없으니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시간들 중 제대로 '나'에게 집중하며 보낸 시간은 얼마나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맘껏 잘 수 없을 때, 쫓기듯 밥을 먹을 때, 책 한자 제대로 읽지 못해 머리가 텅텅 비어 가는 자신을 보며 자아의 해방을 외쳐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만난 것은 다시없을 축복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의 자아는 스스로 찾기로 결심한다. 하루에 한 글자라도 적어보고,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졸려도 딱 한 장이라도 읽다 보면 ( ...) 그렇게 지내다 보면 너도 나도 훌쩍 자라 있겠지. 

20160717, 비오는 날 아침 외할아버지네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너와 나의 성장을 위해
딸, 우리 오늘도 잘 살았다. 그렇지?

너의 자아가 하루하루 충만해져서 옷 입기를 꺼려하고, 먹을 것을 치우면 슬피 울지만 그래도 널 사랑해.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화장실 슬리퍼를 먹기를 좋아하는 너. 하루가 다르게 무게가 늘어가는 너를 화장실에서 꺼내오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일과가 된 것도 즐거움으로 소화할 수 있는 엄마가 되어볼게. 

워낙 많이 먹어서 하루에 응가를 여러 번 하니 무척 분주하더라. 그런데, 똥이 이렇게 감사할 줄이야. 너를 만나 다른 세상을 알게 되니 작은 일에도, 큰 일에도, 오늘 하루 너와 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이토록 감사한 일일 줄은 몰랐다. 감사, 다행이라는 말 참 많이 하게 되더라. 엄마의 자아는 스스로 찾아볼 테니, 너의 자아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해보자꾸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딸, 내일도 잘 지내자. 


20160505, 세상에 둘은 없는 행복한 꿀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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