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엄마,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엄마들 처지가 대부분 비슷할 테다. 21세기를 어찌어찌 살아가는 대부분의 한국 엄마들을 돕는 육아 메이트는 육아용품들이다. 아빠는 늦게 오고, 할아버지, 할머니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오로지 의지할 것은 '장비'뿐. 오죽 요즘을 사는 우리에게 육아는 템빨이라는 말이 있을까.
이상은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며, 정돈된 테이블 위에 KINFOLK 잡지와 가볍게 마실 차 한 잔이 놓인 일상을 꿈꿔본다만 현실은 아침부터 급하게 재생되는 뽀롱뽀롱 뽀로로. 집 안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여기저기 치대는 물건들이 산더미다. 이러다 보니 이사만이 정답인가 싶다가도 당장 이사 갈 형편은 안되니 또다시 미련하게 움켜쥐는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이사를 간다고 해도 인테리어의 완성은 청소라는 건 모르는 이 없을 터, 어차피 이사를 간다 해도 '청소'가 불가능한 삶이라면 이사를 하고 얼마 후는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이렇게 까지는 아니었는데, 어째 갈수록 태산이다. 그렇다. 우리 집은 물건에 점령당한 상태다.
이성적으로는 구매를 멈춰야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생각처럼 절제하기는 어려운 법. 아니라고는 해도 이미 나는 자본주의의 노예. 가끔은 아닌척하려 하지만 실은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다. '필요하면 사야 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진리인 것 마냥 그러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다. 아들이 분유를 먹기 시작하자 용량이 넉넉한 보온병을 사려다 남편과 옥신각신 했다. 덧 붙이자면, 사려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엄마들이 너도 나도 추천한다는 브랜드로 사고 싶어 졌다. 남편은 집에 보온병이 있는데 왜 사냐고 했고, 나는 앞으로 분유를 여러 번 먹게 된다면 큰 병이 필요하고 보온 기능이 오래 지속되는 물건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어쨌든 남편은 지금 당장은 그렇지 않으니 반대라고 했고, 남편의 말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져서 라기보다는
"더 불편해지면, 사고 말 테다"라는 속셈으로 일단은 구입을 보류했다.
막상 물건을 사지 않고 지내보니 그럭저럭 지낼만하다. 보온병이 작긴 하지만 작은 보온병을 두 개 정도 사용하면 될 일이고 씻는 일이 귀찮긴 해도 당장은 불편하지 않으니 만족한다. (집에는 학회 등 행사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작은 보온병이 딱 두 개 있다) 잘 생각해보면 꼭 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을 사서 예쁜 쓰레기, 값비싼 쓰레기로 만들어 집안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는 물건들이 꽤 될 테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물건을 사는 데 있어 너무도 즉흥적인 내가 과연 보온병을 사지 않고 약 2년을 버틸 수 있을까 궁금하다. 새 보온병 없이 얼마나 지낼 수 있는지 시험해 봐야지.
지난 주는 어린이집 방학이었다. 태어난 둘째는 산후도우미 이모님과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딸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키즈카페에 갔다. 편백나무칩으로 놀이를 할 수 있는 곳에서 같이 놀던 아이 친구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무칩을 퍼 나를 수 있는 작은 삽을 두고 서로 잡아당기고 울고불고 야단이다. 힘을 제법 쓸 줄 알게 된 딸은 두 돌이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부쩍 다른 친구들이 갖고 노는 물건들을 빼앗는 일이 잦아졌다. 친구가 물건을 먼저 갖고 놀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주고, 친구가 다 놀거든 갖고 놀자고 아이에게 말했다.
통할리 있나. 울고불고 세상 잃은 표정으로 그렇게 슬퍼할 수 없다. 함께 놀러 간 엄마도 아이에게 양보하도록 권하느라 모래놀이하는 곳에 있는 삽을 갖고 오겠다거나 혹은 아이에게 다른 곳에 있는 삽을 찾으러 가자고 했다.
"언니, 괜찮아요. 울게 두세요. 친구가 먼저 하던 거니까 당연히 욕심부리면 안 되죠."
여기까지는 상황에 맞는, 그리고 아이에게도 욕심으로 부리던 고집을 멈추고 어떤 이유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적절한 말이었다만, 나도 모르게 그다음을 잇는 말은 엉망이었다.
"집에 가서 삽 사놓던지 해야지." (삽 사줄게, 사놓을게와 비슷하게 말했다)
이 말을 뱉고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더욱이 같이 놀러 간 엄마에게 민망해 사족을 붙이다가 큰 의미 없이 튀어나온 말인데, 입버릇처럼 튀어나온 이 말 때문에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사줄게
'이런 육아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던 걸, 빼도 박도 못하게 샘플과 꼭 같이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순간 평소 언행을 되짚어 봤다. 필요하면 물론 살 수 있다. 그러나 혹 입버릇처럼 사준다거나 사놓는다거나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떠올려보니 민망해졌다. 수많은 '사줄게'를 말한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상황을 얼떨결에 정리하려고, 혹은 정리하고 나서 갑자기 편한 마음이 들어서 "엄마가 다음에 사줄게"라는 위로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이미 나는 편할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더라.
지금은 아이가 완벽하게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르고, 기억력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집으로 가서 '엄마가 사준댔잖아?'하지 않아 매번 흘러가듯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아이가 조금 더 성장했을 때, 아이가 바라보게 될 엄마의 모습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엄마는 매번 사준다고 하고 안 사주는 거짓말쟁이가 되거나 마구잡이로 사대는 낭비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상황을 괜히 정리하려고 함께 온 엄마에게 너스레를 떠는 것이 아니라 그럴 시간에 아이의 마음을 한 번 더 되짚어주고 다른 놀이로 기분을 풀 수 있도록 하는 게 맞았다. 많은 엄마들이 말하길 우리 아이와 육아서에 나오는 아이는 다르고, 나의 육아와 육아서의 육아는 다르다던데,
나에게 있어 육아의 현주소는 제대로 된, 적절한 실천이 안 되는 '엄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태였다.
사준다며 상황을 마무리 짓는 어제의 엄마를 반성합니다
엄마는 먼저 소비하기 전에 3번 이상 생각하고 구입하는 습관을 몸에 익힌다.
입버릇처럼 상황 정리를 위해 사야지, 사놓을게 등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가 끊임없이 떼를 쓸 때, 크게 심호흡을 한 번 더 하고,
먼저는 "괜찮아"로 시작하는 말을 건네며 상황을 정리할 것.
엄마의 '사줄게' 말버릇을 "괜찮아, 생각해보자, 해보자"로 길들여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