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에 목매는 삶: 보노보 대 침팬지

2015년 9월 17일 일기

by 한솔

'자격(entitlement)'에 관하여

'자격'이라는 말은 인류 사회가 스스로에게 '문명'을 부여하고 나서 문명을 지속가능하게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개념이 되었다. 문명은 '잉여(surplus)'를 전제한다. 인간이 스스로 수렵과 채집의 문턱을 넘어서서 생활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하루 일하고 하루 먹고 그 다음 하루를 준비하는 삶, 그 이상을 가질 때. 그 이상을 가지는 순간 인간의 정신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두 동물, 침팬지와 보노보는 무한한 전쟁을 시작한다.

침팬지는 '귀족으로부터 노예까지, 계급으로부터 카스트까지, 그리고 재산권으로부터 빈궁의 불이익까지 [인류사회의] 다양한 특권과 차별의 범주'를 만들어낸다. 보노보는 이 범주가 가로막는 실존들 간의 벽을 허무려고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특권과 차별의 경계는 끊임없이 세워지고, 다시 허물어지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워진다. (그리고 자본주의도 이러한 동적(dynamic) 역사 속에서 예외가 아니다. 재산권, 조세 제도, 임금, 이윤, 소득과 부의 분배의 양태, 사회보장 등이 중력의과 같은 자연법칙에 상응하는 사회적 법칙이 아니듯이 말이다.)

'자격'이라는 관념은 결국 보노보와 침팬지를 일시적으로 화해시킨다. 물론 이 관념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를 인류 사회와 함께 해왔다. 인류 사회 초기에는 '자연', 혹은 '태생'과 같은 관념으로, 가끔은 '도덕'과 '종교'라는 관념으로,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노력', '지식', '생산성 및 효율성'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관념으로 굳어진 것은 '교환 가치')과 같은 관념으로 차별과 특권의 범주를 제도화한다. (물론 이를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이를 근본적으로 뿌리째 비판하기란 힘들다. 항상 제도는 '최고의 선'을 추구하기 보다는 '최고의 악'을 방지하기 위함이니까.) 결국 이는 인간의 쓸모, 혹은 효용과 가치, 혹은 권리를 화해하게 만드려는 사회적 노력이다.

하지만 때때로 인간은 '자격'이라는 잣대로 부정해서는 안될때가 있다. 보노보들이 사회에서 신음과 절규 할 때다.

언제부턴가 '나 힘들어'라는 말, '못 살겠어'라는 말이 자격이 되어버렸다.

아픔에 자격을 찾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이 될 것을 선언하게 된다. 그 순간 인간의 가치에 대한 모든 질문은 쓸모라는 관념의 흙구덩이에 생매장 당해 질식 당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타인이 다른 타인에게 지옥의 불이 되어버리는 순간, 이해 받으려는 욕망, 격렬한 근원적 분리불안(프롬)으로부터 해방되어 실존이 인정 받으려는 욕망, '찌질하지 않아지려는' 욕망, 사랑 받으려는 욕망과 같은 원초적 욕망은 부정 당한다. 이 모든 욕망이 모든 것에 대한 자격을 따기 위한 투쟁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인생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침투된 '자격화'의 과정은 세상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변모시킨다.

마지막으로 보노보에게 남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 가진 전염성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때로는 공감, 때로는 소통, 때로는 공명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과 체현된 만남 속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깊은 눈을 바라볼 때, 연약한 살을 느낄 때, 그들의 필요와 욕망을 이해할 때, 다른 사람의 존재는 나에게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어떤 제안을 내놓기 전에 이미 인정이나 환영 같은 소통의 몸짓을 취하면서 그들을 향해 마음을 연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스스로 정교하면서도 견고한 '자격'의 아성을 세우고, 이를 통해 심지어 '정의'의 언어까지 독점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자격을 따지면 안된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관한한 자격은 없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목격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끌어안아야하고, 그것을 증언해야하며,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인간에게 보노보가 있는 한 '자격화'된 삶은 사회를 지배할 수 없다.

보노보에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빛과 같아서,

한 실존 한 실존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비록 이는 짓밟히기 쉬운 반딧불, 작은 바람에도 일렁이는 촛불과 같을지라도, 단지 존재함으로써 빛은 스스로 어둠과 싸운다. 아니 스스로의 존재로 빛을 조용히 몰아낸다.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워질수록 역설적으로 미약한 촛불은 더 밝게 빛난다.

(써놓고 보니 마지막에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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