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놈은 어질 수 있는가

2014년 일기

by 한솔

쌩뚱맞은 이야기지만 며칠전에 '논어'를 읽은 친구와 대화를 했다.

그 친구와 '어질다'라는 단어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물론 나는 개인적인 덕목으로써 '논어'가 드높이는 가치들에 대해서 크게 반감을 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질다'라는 단어의 정치학적 함의를 봤을 때는 그러한 덕목을 정치적으로 수용하는데에 있어서 아주 조심스럽다.


'쌍놈'은 어질 수 없다. 결국 어질 수 있는 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리고 '양이 음에게'이다. 가지지 못한자도 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승리일 뿐이다.


어질다는 말. 즉 유교가 강조하는 '인'의 사상 속 깊이에는 인간의 온정 (따뜻함)과 권력관계가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유교는 가장 최상의 통치체제일 때 온정주의가 작용한다. 이는 우연히 정말 진심으로 어진 왕의 통치체제 하에 있을 때나, 정말 자애로운 선생님이 가르칠 때, 그리고 가정적인 가부장이 있을 때 가능하다. (물론 그 체제 하에서도 떠받드는 신하, 학생, 자녀 및 부인은 당연하다고 가정했을 때) 그리고 사실 이 체제가 잘 작용된다면, 그리고 특별한 저항이 없을 때에는 사람의 삶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교 체제가 가장 최악일 때는 폭정이다. 무지막지한 폭정 아래에서는 유교 체제가 지속하려면, 가끔은 '잘못된 왕에 대한 역사적 인정'이 필요하다. 애초에 왕이 되면 안될 사람이라는 후세의 강력한 공동의 (collective) 인식 말이다. 이 왕은 도저히 왕이 되면 안될 혈통/계통의 왕이라든지, 이 왕은 더 큰 하늘의 법도 (mandate of heaven)을 어겼다든지 등등의 도덕론은 '나쁜' 왕에게 칼을 들이댈 수 밖에 없는 예외의 상황을 말하는 대신, 유교라는 거대한 통치 체제를 지켜낸다.


주인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명확히 지워진 사회에서는 더 나은 주인을 대체하는 것으로 그 체제를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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