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일기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종교는 천대 받는 사람들의 탄식이요. 몰인정한 세계의 인정이요.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그것은 대중의 아편이다. 행복에 대한 미망을 대중에게 주는 종교를 폐지한다는 것은 대중의 현실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조건에 대한 미망을 버리라고 대중에게 요구하는 것은 미망이 필요한 조건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가 그 후광인 현세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中 -
문득 들은 생각인데, 어려서부터 우리는 참 '권선징악'의 이야기에 많이 노출되다보니 그것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게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읽어주셨던 수많은 전래동화를 관통하던 하나의 테마인 권선징악은 참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너무 쉽고 간단한 스토리로 현실과 도덕의 복잡한 교차회로를 무시한 스토리 라인이라든지, 개인간의 상호적인 악을 개인간의 문제로써 너무 쉽게 푸는 경우라든지... (특히 후자의 문제의 경우, 또 하나의 파생되는 문제점은 스토리라인이 극단적으로 잔인해진다는 것. 예를들면, 숲속에서 만난 마녀나 제크와 콩나물에 나오는 거인들은 그들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폭력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주목하고 싶은 권선징악 구도의 문제점은 너무나도 쉽게 '악'이 처벌받는 구도에 있다.
보통 아이들이 접하게 되는 권선징악의 동화에서 '악'을 체화하는 케릭터들은 초현실적인 요소에 의해서 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혹부리 영감을 생각해보자. 혹부리 영감은 자신의 자격을 넘어선 부를 너무 쉽게 거머쥐려는 과욕 때문에 도깨비를 찾아갔다가 오히려 혹을 더 달고 만다.
선녀와 나무꾼은? 나무꾼은 솔직하게 자신의 도끼가 아닌 것을 아니라고 산신령에게 말했기 때문에 금도끼, 은도끼 등을 받았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여기서 나의 문제의식을 자극하는 것은 선이 보상받고 악이 처벌받는 것을 가능케하는 초현실적 요소이다.
권선징악의 스토리 구도에서는 선과 악을 판단하고 의미화 하는 것, 또 더 나아가 이러한 가치들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 '우리 (혹은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정치 공동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서 나온다.
물론 우리가 잘 모르는 (하지만 있다고 믿고 확신하는) '저기'에서 궁극적으로 권선징악의 원천이 나온다고 판단하게 되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또한 선을 더 잘 행할 수 있게 우리들을 장려하는 하나의 윤활유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주체로써의 우리 개개인들을 너무나도 쉽게 부정해버린다.
선과 악의 가치는 개개인이 격렬하게 소통할 때 비로소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고,
그러한 가치들에 대한 합당한 판단은 개개인이 떠받드는 권력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권선징악의 주체가 '저 너머'로부터 올 때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복잡성을 너무 쉽게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의 부당함은 외부의 초현실적 요소 (대부분 종교)가 해결해주거나, 나랑은 다른 차원의 개인 (정치 지도자나 경제적 엘리트)이 이를 응징해야한다는 사고 밖에 가질 수 없게 된다. 폭군의 목을 치더라도, 시민들이 자신들을 변화의 주체로 생각하지 못한다면 왕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마르크스는 종교의 정치-경제학적인 함의를 논하면서 그것을 '대중의 아편'이라고 불렀다.
물론 주의해야할 요소가 있다. 당시에는 현재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처럼 아편을 단순한 '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 심각한 환자를 치료할 때 쓰는 마취재 같은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감각을 일시적으로 무디게 해주는 것. 그래서 병의 증상은 그대로, 그리고 육체의 훼손은 그대로 존재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기인한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이 당시의 아편이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것은 '지금 여기', 즉 동시대의 사회적 불의를 뒷받침하는 권력구조와 경제적 하부구조를 무시하고, 단순히 종교적 권선징악을 외치는 것은 개개인에게 순간적으로 행복을 주는 것 밖에 못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함이였다.
(물론 종교계에서도 그 이후 '해방신학', '민중신학'등의 새로운 사회변혁에 대한 의지를 담은 신학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이런면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종교에 대한 비판보다는 '권선징악'의 주체를 현실의 복잡성을 뛰어넘은 '외부'에서 찾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짚기 위해 맑스를 인용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동화들을 아이들에게 읽혀야 할까?
확답을 하기엔 너무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고, 쉽지 않은 복잡한 문제지만...
나는 <무지게 물고기>란 책에서 실마리를 찾아본다.
자신의 무지게 비늘을 다른 물고기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혼자서 반짝이려는 욕망만 지속시키던 무지게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결국 그 비늘을 다른 물고기에도 나눠주게 되니 다른 물고기에게도 환영을 받았고 평화로운 바다가 유지되었다...는 얘기를 지닌 무지게 물고기.
물론 이 스토리도 삶의 복잡성을 무시한 측면이 있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존재의 상호성에 근거하여 윤리의 판단과 이행이 현실화 되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비늘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도깨비들이 혹을 달아준게 아니라,
그리고 비늘을 나눠주었다고 해서 용왕에게 상을 받는게 아니라,
바로 그 물고기의 '곁'에 있는 다른 존재들에게 사랑을 상호적으로 나누는 존재가 됨으로써,
공동체와 정의가 지켜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