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숫자. 목적과 수단

2014년 3월 일기

by 한솔

"내 경우는 또 어떻구요. 내 두 아들과 조카 세 놈이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중이랍니다." 또 다른 승객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걸요."

남편이 기운을 내서 말했다.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아들이 하나라면 버릇이 없어질 정도로 애지중지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소? 부모의 애정이란 빵처럼 여러개로 쪼개어 골고루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란 자식이 하나이든 열이든 아무 차별 없이 모두에게 자기의 모든 사랑을 베푸는 법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두 아들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아이들 각자에 대해 반반씩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아들을 지닌 아버지보다 두 배로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맞습니다..." 당황한 남편은 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물론 선생께 이러한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만일 아들이 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아들이 싸움터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아들이 살아 남는다면 아직도 그를 위로해 줄 아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야 그렇지요"라고 상대방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아버지를 위로해줄 아들이 하나 남는 셈이지요. 하지만 그 아버지는 남은 아들을 위해서 삶을 포기할 수는 없지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라면야 그 아들이 죽으면 같이 죽어 근심과 고통을 잊을 수 있지요. 어느 경우가 더 비참하겠습니까? 내 처지가 선생의 처지보다 더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루이지 피란델로의 <전쟁> 中


고등학교 때 <World Literature> 시간에 읽었던 작품 중에 기억에 남는 몇 안되는 작품 중에 하나인 루이지 피란델로의 <전쟁>. 정말 짤막한 단편이지만 그 당시 이 부분은 나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었다. 맥락은 간단하다. 배경은 이탈리아에서 달리는 야간 특행열차 안. 세계 1차대전의 발발 때문에 자식을 징집에 보낼 수 밖에 없는 부모들의 대화를 길게 늘어뜨려 놓은 이야기이다.


내가 인용한 대화는 한 명의 자식을 전쟁터에 내보내게 된 부모와 두 명 (그리고 세명의 조카)를 전쟁터에 내보내게 된 부모들 간에 이루어진 것. 이들은 누가 더 슬퍼야 하고 누가 더 위로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하게 된다. 한 명의 아들을 둔 부모는 한 명의 아들이 만약 전쟁터에서 사망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더 슬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명의 자식을 보낸 부모는 그의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부모의 애정은 자식의 숫자와 관계없이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걱정할 아들이 두명이라는 말은, 한 아들을 지닌 아버지보다 두 배로 더 걱정해야 한다는 것.


누가 더 슬퍼해야할까? 두 부모의 주장을 깊게 들어보면, 우리는 두 부모의 입장 모두 부정하긴 힘들다.


인간에겐 언어도 있지만 숫자도 있다. 우리는 사람을 목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가끔 어쩔 수 없이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공감을 하기도 하지만 비교를 하기도 한다. 남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기도 하지만, 그들의 고통과 행복을 나의 감정과 비교하기도 한다.

<경제와 윤리>라는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왔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나를 고민에 빠트리게 만들어버린 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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