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일주일 동안의 휴식이 허락되는 가을 방학이 왔다.
평소에 하던 산책보다 약간 더 길게 산책했다.
가을로 물들어가는 시간을 잠시 눈으로 부여잡고 싶었다.
생명의 파릇파릇한 빛을 뿜어내는 잎들과 임종을 기다리며 울긋불긋함으로 마지막을 조용히 물들이는 잎들이 공존하는 시간.
이는 바람에도 살랑이며 나무를 부여잡는 잎들과 바스락 바스라지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려는 흙속으로 꺼져들어가는 잎들이 공존하는 시간.
삶과 죽음. 죽음과 삶. 만남과 이별, 이별과 만남이 함께 뒤엉켜 꿈틀대는 시간.
그 시간을 잠시 부여잡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옮기며 경이로운 빛들을 눈과 카메라로 빨아들이려 했다.
마지막 학기가 지난 학기들과 참 다르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극히 줄다보니 혼자 내 안에서 꿈틀대는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많아졌다. 게걸스럽고 불안정하게 읽고 발췌 글만 쌓아놓던 시간들을 조금씩 쓰는 시간에 양보하다보니 마음이 약간 편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거의 안마시다보니 정처없이 산책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산책을 많이 하다보니 자연과의 관계도 변해가고 있다. 자연을 보는 눈도 변해가고 있다. 이번학기에 내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는 최대의 선물인듯 하다.
실은 자연의 '자연스러움'이 낯설게 느껴졌었다.
복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경외심을 느낄 수 있는 광대한 숲,
생명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순환하는 나무들,
낯설게 보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빛을 반짝이는 낮의 잎새들,
우리가 일으켜 새워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흙을 뚫고 나와 스스로 생명을 틔우는 새싹들.
우리에게 그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이러한 생명들이 역설적으로 너무 낯설었다.
내가 공부하는 것들이 죄다 인간이 서로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하는 진실들에 대해서 다루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랬던게 아닌가 싶다.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모두 '성찰적 거리'를 두고 사회를 낯설게 바라볼 때 좋은 통찰이 생기는 학문들이다. 자연스러운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지 않을때 좋은 생각들이 나오는 학문이다.
인간들이 만들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질서에 근본적으로 '자연스러운 질서'는 사실 없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현재 느끼고 있는 질서도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갈등이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그 질서를 뚫고, 다시 새로운 질서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정착된 것들이다. 정치학은 '자연스러운 질서'는 '온정주의'의 다른 이름일뿐이고, 온정주의란 자발적 복종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자발적 복종이란 두려움과 관성의 다른 이름 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속 상기시킨다. 때로는 너무 강박적일 정도로. (4년을 공부했지만, 가끔은 좋은 정치학자의 자질은 '적절한 편집증'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날때도 있다...ㅎㅎ)
사르트르는 '두려움에서 나온 경외심만큼 비열한 것은 없다'며 우리의 두려움을 깨고 사회에 대해서 증언할 것을 요구하고,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보복할 수 없는 무력함은 '선량'으로 바뀌고, 겁 많은 비열은 '겸허'로 바뀌며, 증오하는 상대에 대한 복종은 '순종(자세히 말하면 이러한 복종을 명령하는 자에 대한 복종)'으로 바뀐다. 약자의 비공격성, 그들이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비겁 그 자체, '문전에서' 서성거리며 어쩔 수 없이 기다리는 것--이러한 것들이 여기서는 '인내'라는 발림말로 불리우고 심지어는 덕 그 자체로 불리운다"라며 우리가 진정 우리 삶의 주인으로 살아왔는지 질문을 던진다.
결국 강박적일 정도로 질문을 던져야 좋은 '사회적' 통찰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이 없는 삶에서 우리는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포섭될 수 밖에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정치적이고, 모든 것이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질문이 없이는 그나마 더 나은 정치적 질서로 수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헌법 제 1장 1조 2절에 쓰인 것처럼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운 말에도 사실 여기서 말하는 '국민'은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선행하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는 불가능하다.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질문 없이 우리는 '국민'이란 말에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욕망, 실현되고 싶은 현실을 너무나 쉽게 투영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없는 욕망의 투영은 새파란 당에서도, 샛노란 당에서도, 새빨간 당에서도 모두 '국민'을 위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때 결국 알맹이 없는 희망이나 대책없는 냉소의 표로 귀결되고 만다.
하지만 자연은 너무나도 쉽게 우리 스스로 주체적인 욕망을 투영해줄 수 있게 해주고, 그 욕망을 보듬어준다. 창밖에 내리는 똑같은 눈을 우리가 가진 두개의 눈으로 보아도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 성삼문에게 눈은 억압과 고난 ('백설이 만건곤 할제 독야청청하리라')을 보고, 김구 선생은 후세에 남을 발자국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아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본다. 어린 아이는 눈은 눈 사람이고, 공무원들에겐 밤새 치워야 할 것, 그리고 자기 전 창밖을 바라보는 연인들에겐 자는 동안 세상을 덮어줄 하얀 이불이다. 우린 그렇게 새하얀 세상에 우리의 욕망을 투사시켜 마음대로 울긋불긋하게 색칠한다.
이렇게 자연의 '자연스러움'이 부자연스럽고, 혹은 '낯설지 않음'이 낯설게 느껴지던 내가 자연을 정말 편한 벗처럼 느끼게 된 것은 산책을 통해서인 것 같다.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에서 보는 압도적이고 역동적인 사회 변화들, 그런 변화의 흐름 속에 때로는 떠밀려가고 때로는 내동댕이 쳐지며, 때로는 그 흐름을 온몸으로 막는 인간들의 역사와 씨름하다가 지쳐서 자연으로 나가면, 자연은 정말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준다. 그저 터질 것과 같은 감정은 차분하게, 생각은 더 명징하게 걸러주기만 한다.
걷다보니 자연의 '자연스러움'이 좋아진다.
굽어보아도, 고개를 치켜들어보아도 경이로움이 있다. 굽어보면 꿈틀대는 새 생명의 푸르름이, 고개를 치켜들면 끝을 알 수 없는 하늘의 푸르름이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스스로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질투나 불안 없이 받을들여주는 하늘이 있다는게 좋다. 촉촉한 잎사귀가 생명의 푸르름을 발산할 때, 그리고 바삭한 잎사귀가 바스라지며 땅 속으로 스며들어갈 때, 그 순간들을 볼 수 있는게 축복이다. 생과 사의 순환을 진지하게 대면하게 되면 대책없는 초연함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자연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초연함이 아닌가 싶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경이로운 자연을 보면 아무리 위대한 인간도 그렇게 경이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치열하게 사는 인간들에게 존경심을 느낄 지언정 경외심은 느끼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죽음마져도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 살면서 공부하는 동안 내가 마주쳐야할 수많은 잔혹한 진실들도 끌어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나무가 뒤덮인 길을 걸으며 생명의 빛을 빨아들이는 동안, 광대한 어머니 품에 안긴 조그만 아기의 기분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지 않아도 생명이 온전히 스스로 거주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스스로 발견해가고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