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추모에 관하여.

2015년 10월 5일 일기

by 한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메일창을 열어보니 새로운 총장님 (이번 주말이 우리 학교의 새로운 총장 취임식 기간이다)이 보낸 메일이 있었다. 시기를 고려하면 당황스러운 제목인 'tragic news'라는 제목으로 전해진 메일이였는데, 확인해보니 학교의 2학년인 한 학생이 학교 옆에 있는 숲 ('crum woods'라는 곳)에서 죽은채 발견되었다는 비보였다.

사실 얼굴도 잘 모르던 청년이였지만 아침에 마음이 좀 무거웠다. 페이스북을 보니 그를 알던 친구들이 쓴 애도의 글이 적지않게 발견될 수 있었다. crum woods는 나도 몇 번 갔었고, 미끌미끌한 지면에서 비틀 할 때도 한두번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글들과 기억 때문에 그의 죽음이 더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삶들로 둘러 쌓여있는 일상적 삶으로 둘러쌓인 삶을 뚫고 나와 우리를 푹 찌르는 이런 난데없는 소식은 손에 잡힌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일단은 내려놓게 만든다. 아주 잠시일지라도. 그리고 답 없는 것들, 우리가 실존하는 동안 철저히 무지할 수 밖에 없는 미지의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세상에 올때는 난데없이 '내던져'졌다가, 갈 때는 난데없이 '채여'가는 삶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들이 답이 없는 내용임을 알면서도 질문이 머릿속에 번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다. 차곡차곡 더해나가는 것이 삶이라면, 죽음은 '곱하기 제로'(길희성)라는 것. 목적과 관계와 감정과 노력이 차곡차곡 더해져 삶을 풍성하게 만들지만, 더해진 것들이 아무리 크다해도 결국 제로로 곱하면 결과는 제로일 뿐이다. 이 제로는 언제 우리에게 곱해질지도 모르고, 우리의 삶이 얼만큼 '더해졌'을 때 올지도 모를 뿐이다.

사실 세상에 남은 이들에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남아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제로의 운명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남은 일은 어떻게 떠난 이의 죽음을 함께 받아들이고 다시 남은 삶에서 함께 의미를 찾을지 함께 고민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애도와 추모라고 부른다.

제노사이드와 관련한 수업을 들으면서, 세월호 이후, 그리고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조직할 당시 (우연히도 기간이 겹쳤었다), '애도'란 무엇이고 무엇이여야 하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인간의 소멸 앞에 산 자들이 모여서 나누는 것이기에 결코 '좋은 애도'는 없을지라도 좀 더 '나은 애도'는 무엇일까.

뚜렷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결국은 두가지 인 것 같다. 넋놓을 수 있는 시간과 함께하는 시간.

충분히 넋놓고 슬픔에 잠기거나 울 수 있을 때 사람은 역설적인 치유의 과정을 거칠 수 있는 듯 하다. 넋을 놓는 다는 것은 정신이 빠진 상태이므로 시간성과 공간성에 대한 의식과 감각이 잘 깨어있지 않은 채 스스로를 한 감정에 가두는 것인데,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의식은 다시 시공간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일상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충분히 미래(에 대한 감각)를 잃어버릴 수 있어야 다시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함께하는 시간은 더욱더 중요한 듯 하다. 한 인간을 둘러싼 온 공동체가 그 사람의 죽음을 함께 슬퍼할 때, 우리는 서로의 촉촉해진 눈, 터질듯한 눈망울, 쏟아지는 눈물 줄기 등을 함께 보며 공동체는 함께 상실감을 이겨낸다. 서로 확인하는 촉촉한 눈은 우리에게 일종의 자존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그렇게 어떤 말을 꺼내기 이전에 이미 애도의 공동체는 우리들의 삶이 헐렁헐렁 하지만, 말랑말랑하기도 하기에 살만한 것이라 긍정하며 다시 삶을 살 준비를 하게 된다.

오늘도 쓰다보니 하루가 지나버렸다. 이제 내일이 된 오늘을 준비해야 할 때다.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느낀 상실감을 연기처럼 떠나보내기 위해 시 한편 읽고 다시 과제를 손에 쥔다.

잔디 깎는 기계가 멈추었다, 벌써 두번째,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니,

칼날 사이에 고슴도치 끼어 죽어 있다,

긴 풀 속에 있었던 것이다

전에 이 녀석을 본 적이 있고,

한 번은 먹을 걸 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눈에 띄지 않는 그 세계를

내가 망가뜨린 것이다

수리할 수도 없이

땅에 묻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어났지만

고슴도치는 그러지 못했다

하나의 죽음 다음의 첫날,

새로운 부재는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친절해야 한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 필립 라킨 <잔디 깎는 기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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