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8일 일기
공부를 하다보니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요샌 정말 읽고 듣다보면 가슴이 '탁' 막혀 '억' 소리도 잘 안나올 정도로 나를 당혹스럽고 절망스럽게 만드는 언어들이 득실득실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멘붕'에 빠질 때가 있다. 같은 언어지만 정말 이승과 저승의 거리처럼 멀게 느껴지는 그런 언어들. 학문을 하는 이는 일단 모든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갈등과 철학적 역설을 다 끌어안은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할말을 걸러내서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도저히 이걸 끌어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되는 지점들이 종종 있다.
나이지긋한 우익분들이 '국부'를 내세우며 길거리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준엄하게 우리들을 향해 꾸짖을때, 하나님 '아버지'의 기약 없는 구원이 하늘에서 그져 떨어져 내릴 것이라고, 그것을 진심으로 갈구하면서 아버지를 위한 신전 앞에서 낲작 엎드려 있기만 할 때, 도대체 이분들의 가슴 속에 아버지란 무엇일까. 이들의 가슴 속에 있는 아버지와 내 가슴 속에 있는 아버지가 같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공존하는 시간동안, 이승과 저승만큼 먼 역사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 함께 역사를 창조해나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
손에 박힌 매정한 나무 가시, 너무 아프진 않지만 성가시게 손에 콕 박혀버린 가시처럼 뇌리와 가슴 속에 콕 박혀서 지금 (금요일 밤)까지 안빠지는 글이 하나 있다. 이번 주에 페이스북을 통해 일파만파로 퍼지던 기사 하나. 정치-경제적 견해의 간극도 확인해주었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건 단 한문장 밖에 없는 그 기사. '죽을 만큼 아프다면서 밥만 잘 먹더라'라는 말에서 나는 또다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다른 역사의 간극을 확인한 것 같다.
정말로 모르는걸까.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배고픈 사회(hungry society)의 틀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분노하는 사회 (angry society)로 급격히 전환하였다는 걸. 시대정신과 시대적 과제의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징표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OECD 1위의 자살율(세계 3위)과 꼴찌인 출산율(세계에서 끝에서 5위)는 이제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노력만을 내세우니 나는 잠이 들 수 밖에. 그 글을 생각하면 입을 열며 함께 찍하고 삐져나오는 찌질한 눈물 한 방울과 함께 허공에 쓸모없는 하품을 내뱉어 줄 수 밖에...
인간은 스스로 '자살'을 하는 몇 안되는 동물이고, 물질적인 필요들이 충족되어도 끊임없이 스스로의 쓸모와 가치에 대해서 질문하는 존재들이다. (때론 그 두 가치는 같아보이지만, 서로 기대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가치가 무너지면 다른 가치도 같이 쓰러질뿐) 때로는 스스로도 너무나 강해 보이지만 타인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고독하고 쓸모없는 존재들이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지만, 그 양식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공동체가 필요하고, 단순히 걸칠 수 있는 옷이 필요하지만, 그 옷은 사회적 정체성과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몸을 맡길 수 있는 집이 필요하지만, 그 집은 충분하게 내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이여야 하기도 하다.
이런 인간들이 모여 고도의 사회 발전을 이루게 되면 그만큼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지능과 정신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퍼즐은 맞추기 시작할 때 쉽다. 아무 조각을 끼워넣어도 그림이 나오는 것 같다. 혹은 맞출 퍼즐마저 없다면 스스로 아무 조각이나 그려 넣으면 일단 뭔가는 채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의 완성될 때쯤 보면 대강 끼워 맞춘 퍼즐들은 해악이 된다. 하나를 제대로 맞추려고 해도 잘못 맞춘 여러 조각들을 다 뜯어내서 다시 맞추어야 한다. (게다가 이미 들어간 조각은 기이한 형태로 다른 조각에 딱 달라붙어 잘 옮겨지지도 않는다)
물질재(material good)이 충족해진 사회는 지위재(positional good)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할 수 밖에 없다. 지위재는 상대적으로 희소하고 상호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상징 교환에 따라서, 그리고 경쟁과 협력을 포함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환경, 교통, 교육, 일자리와 같이 말이다. 물질재는 부족할 경우 그저 공급을 확대하면 되지만, 지위재는 상대적이고 관계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단순한 공급확대가 해답이 될 수 없다. (교육에 대한 무분별한 환상과 교육제도의 사회-정치적 몰이해에 따라서) 대학진학율은 85%로 세계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솟게 되지만 그 교육을 받은 이들이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고 잉여가 되어버리는 사실만 봐도 그렇고, 주택보급율은 전국적으로 110%에 달하지만, 부동산 문제, 내집장만 문제 등이 들끓는 현실만 보아도 그렇다. 한국 고등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세계 2위를 종종 차지하곤 하지만 1위인 핀란드보다 공부시간은 두배라는 점, 그리고 대학 진학 이후 학업성취도는 급격하게 저하된다는 점은 무분별한 경쟁이 낳는 '공작들의 꼬리 경쟁' (경쟁을 위한 경쟁으로 그 낭비가 효용을 능가하는 현상)의 폐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교육의 본질과 공감 및 상호주체적 소통에 기반한 인간관계는 얼마나 많이 파괴되어 왔는가...+ 내가 좋아하는 한 논문에서는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한국에서 경쟁의 양상은 '과감한 창의성 경쟁' 대신 '소극적 위험 회피 경쟁'을, '사회적으로 최적화된 실력 경쟁' 대신 '과도한 간판 따기 경쟁'을, '조화로운 공생 발전' 대신 '약육강식의 승자 독식' 경쟁을 한다.")
무작정 발전 할 때는 중요하지 않았던 신뢰와 투명성, 그리고 사회적 응집성 (다 합쳐서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도 대두 된다. 합의된 절차도 없거나 무시되고 진행된 발전, 결과주의에 기반한 부패 등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발전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최고의 해악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예상가능한 부분을 떠나서 기형적인 방식으로까지 우리 사회에 해악을 미치는데, 예를들면 공공기관과 교육기관에서 사람을 뽑을 때 그 기준이 편집증적으로까지 '공정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수치화 될 수 있는 요소들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의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가 밑바닥을 치는 사회에서 이렇게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는 최악이라도 피하기 위해서 실질적 개성/능력과 같이 수치화되기 어려운 요소들을 배제해버리고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철저히 성적과 같은 요소들로 사람을 뽑을 수 밖에 없다. 이는 한 조직의 장기적 역능과 효율성을 아래에서부터 갉아먹는 심각한 요소다.
또한 우리는 '부유하지만, 부유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유한 것이지 개인으로서 부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당연한 것처럼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를 하나로 엮어 전체 사회로 만들어주는 유대가 끊어진다면 그 또한 사라져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일브로너) 발전은 사회 전체를 부유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에 동반하는 사회적 지능과 합의가 없으면) 개인의 경제적 취약성과 사회적 위험은 증가할 수 밖에 없다. 거대한 기술의 발전과 노동분업은 상호의존성의 증가로 우리들의 능력을 증대시켜줄 수 있지만, 그만큼 우리의 삶의 방향은 분업화된 요소 하나하나들에 떠맡겨질 수 밖에 없다. '1억 3천만명의 노동력이 존재하는 미국의 경우...전체 비행 노선의 승무원 수가 약 6만명, 그리고 온나라 철도 화물을 운송하는 기관차 운행 노동자 수가 더 작다'는 아주 기초적 사실만 봐도 그렇다. 한순간에 이들이 없어진다면 그 거대한 경제강국 미국도 한순간에 마비가 올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력을 사용하는 일도 개인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난다. 노동자는 큰 기계의 일부가 되는데, 문제는 그 기계가 노동자의 능력이나 예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원인들 때문에 언제라도 멈출 수 있다는 점이다.' (헨리 조지)
야만사회에서 한 인간은 추방 당해도 다른 곳에서 적어도 지속가능하게 살 수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본,기계,분업에 길들여진 인간들(혹은 집단)에게 사회적 배제는 경제적 죽음을 이야기한다.
게다가 생로병사를 추동하는 주요 요소조차 바뀐다. 한 사회가 산업화에 진입하기 이전 나쁜 건강과 죽음의 주요 원인이 전염병과 같이 위생에 관련된 것이라면 (이는 19세기 사회 개혁가들을 움직이게 만들었고, '공중위생 운동'과 같은 개혁을 추동하게 만드는 원인이였다), 산업화 이후의 사회는 '역학적 전환'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사망의 원인은 심장병, 암과 같은 것들인데, 20세기 후반부터 연구자들은 이러한 질병들을 추동하는 핵심 원동력 중 하나가 '스트레스'라는 쌩뚱 맞은 사실을 발견한다. (윌킨슨) 실제로 어떤 과학 연구결과를 보면 담배나 비만과 같은 요소들 때문에 심장병에 사망할 확율보다 개인의 심리적 통제력과 스트레스 때문에 죽을 확율이 높다는 것들도 종종 있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통합 등을 가르켜 '심리 사회적 요소'라고 부르고 한 사회의 불평등 정도와 사회적 자본 등을 이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라고 보는데, 이러한 연구만 봐도 사회 구조가 단순히 자살 뿐 아니라 얼마나 그 구성원들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 알 수 있다.
아무튼 쓴 내용들을 생각해보면 우리 시대에서 요구되는 것은 '좋은 사회', '사회적 발전', '사회의 질'에 대한 깊은 질문 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쓸모와 가치, 경쟁과 협동, 이기성과 이타성, 자유와 평등, 개인의 경제적 동기와 사회적 동기, 노력의 깊이와 방향, 개인의 사회경제적 역능/역량과 사회경제적 안정성, 사회적 응집성과 포용성 등과 같은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한 변화가 어떤 모습이여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충돌하는 요소처럼 보이고, 어쩌면 정말 화해할 수 없는 반대의 가치일 수 있지만, 적어도 최대한으로 끌어안고 조화시켜보려는 노력, 제로섬이 아닌 포지티브 섬으로 만드려는 사회적 노력이 요구되는 것 같다.
아무튼 열폭해서 거칠고 두서없이 쓰다보니 금요일이 지나가려 한다. 정작 급한 글은 쓰다 내려놓고 이렇게 주저리 늘어 놓아도 시원한 감이 없다. 외계에서 온 것처럼 멀게 느껴지는 글 하나가 여전히 금요일 밤의 고민과 고뇌를 콕콕 찌를 뿐이다. 편린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만드는게 글이라는데, 점점 더 쓸수록 글은 갈 길을 잃는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뒷북' 칠뿐이라고 종종 말하지만, '시대정신' (그리고 시대적 과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다.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거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을 뿐인 단어이지만 정말 오늘은 부여잡게 되는 단어다.
오늘 읽은 기사가 쌩뚱맞게 떠오른다. 대만의 정신적 지주로 불린다는 장쉰 작가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그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참 재밌게 재해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코를 만진 장님, 다리를 만진 장님 모두 논쟁에 이겨봤자 결론은 틀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 느꼈던 코끼리에 대해서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로가 다르게 느꼈던 코끼리를 터놓고 얘기하다보면 '비교적 완전한 코끼리'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이 말도 오늘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밥만 잘 먹더라'라는 말이 확인해주는 시대인식의 간극이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