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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노 May 08. 2024

본전 생각하면 나아갈 수 없다

멈춰야 할 때를 놓치면 방황이 길어진다

경제학에서 "매몰비용"이라는 개념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미 지나가서 더 이상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인 매몰비용은 경제적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고려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개념인데 실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우리네 인생에서 이 매몰비용을 절대 모른 척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농후한 게 사실일 것이다. (사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도 와닿지 않는 개념 중에 하나가 매몰비용이었다. 내가 쓴 시간과 돈을 어느 결정의 순간에 전혀 없었던 것처럼 고려해야 한다니. 어떻게 보면 비인간적 사고에서 기인한 개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며 어떤 선택을 할 때 이전에 내가 했던 모든 수고와 노력을 잠시 내려놓고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순간이 분명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출처는 잘모르겠습니다. 그림체는 광수생각의 박광수님의 그것과 비슷한거 같은데.)


인생을 B와 D사이의 C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 삶이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인 것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선택에는 어떤 형태로든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인지 한번 내린 선택은 자의든 타의든 쉬이 되돌리기가 힘들 기는 하다. 특히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다고 느껴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내린 선택의 결정은 더 많은 아쉬움과 미련을 갖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을 그 선택에 구속시키고 그 선택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있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사이 잃어버리는 것은 더 많아지고 전환의 기회는 사라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선택을 할 수도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니 그 선택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매몰비용"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간 것들이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선택에 너무나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면 좋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인생의 선택에서 매몰비용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것은 내려놓고 온전한 현재에 집중하여 기대하는 미래를 잘 고려해서 선택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것이다. 신림9동의 메인스트리트. 저 거리를 얼마나 헤집고 다녔는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고시"라는 시험을 보기로 결정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4년 반정도되는 고시생활에 있어서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고시낭인이라 일컫는 고시 지박령을 빼놓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며 그렇게 똑똑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지적능력에 대한 의심 하지 많은 사람들을 고시생활 때보다 많이 만나본적이 드문 거 같다. 자신감을 넘어 오만과 자만에 가까운 자기애가 가득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수 있는지 그때 알게 되었다. 그러한 자신감이 없이 고시생활을 버티기도, 고시에 합격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양면적이지 않은가. 그런 자신감으로 합격도 할 수 있지만, 그 자신감이 자신을 "고시"라는 늪으로 계속 끌고 가기도 한다. 고시낭인으로의 전환은 그리 어렵지도, 그리 극적이지도 않았다. 마치 친구에서 연인으로 깊어지는 잔잔한 감정의 물결처럼 스며들듯이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년 고시촌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고시낭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정말 친한 동생이 그러했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재주와 능력이 출중한 녀석이었다. 내가 고시공부를 시작하게 한 원흉(혹은 은인?!)이 바로 그 녀석이었다. 지금에야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 당시에는 매일을 함께 지내는 단짝 중에 단짝이었다. 내가 공부를 시작할 때도 이미 그 녀석은 몇 년 차 수험생이었고 내가 운 좋게 합격을 했을 때는 수험생활이 곧 10년이 될 지경이었으니 장수생의 반열에 충분히 오른 상태이기는 했다. 사실 나도 그리 착실하거나 똑똑한 사람은 아니어서 수험생활이 동기들에 비해 꽤 긴 편이긴 했지만 수험생활중에도 살 궁리를 계속했던 케이스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수험생활을 시작한 것도 있었지만 집에서 생활비와 학원비를 받으며 공부하는 기간이 2년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속이 바짝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밥은 굶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으로 7급과 9급 시험도 보고, 낮은 영어성적으로도 응시가 가능한 NCS 기반 채용 도입으로 공공기관 신입사원 채용에도 지속적으로 응시를 했었다.(운 좋게 합격한 곳도 있었던 것을 보면 인생사 죽으라는 법만 있는 건 아니구나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내 수험스타일과 마음가짐이 그 친구에겐 상당히 불편하고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었던 거 같다. 누구보다 친했던 형이자 공부 동료가 어느 순간부터 "고시"외에 다른 곳에 관심을 보이고 꼭 "고시"합격이 아니라도 먹고살 방도는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니 왜 저러나 싶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어느 날 쌓였던 감정이 폭발했고 서로 더 이상 만나진 않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시험을 합격해서 입직을 했고 건너 들은 풍문에 그 친구는 계속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의 인생을 재단할 것은 아니지만 저 능력 넘치는 청년이 십여 년을 "고시"에 소비하고 있는 상황이 아까울 노릇이다.


아무튼 그 친구가 자주 했던 말 중이

"부모님이 이렇게 지원해 주셨는데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하다가 마는 것은 아니함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가려는 길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등이 있는데 무엇하나 "고시"라는 생활에서 쉬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생각들이었던 거 같다.


사실 무엇인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은 사람에게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 내려놓고 다른 것을 찾아보자라고 말한다면 어이없음을 넘어 분노가 치밀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돈도, 시간도, 친구도, 청춘도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자신이 처음에 목표한 것마다 내려놓는다면 대체 남는 게 무엇인가.


그러나 지나가 나서 보니 그 순간이야말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라고 생각이 든다. 정말 거기 더 더 나아가 더 많은 것을 잃고 난 뒤에는 아예 옆도 쳐다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아니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찾은 길을 다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3단계가 있다.


1단계. 무엇보다 현재 자기 상태를 온전히 객관화해서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공부를 예로 들면 실제 자신은 그 공부에 얼마나 열심인지(하루 중 순 공부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공부한 만큼 이해도와 지식이 늘어나고 있는지 등), 그리고 시험 과목에 대한 친밀도가 높은지(책만 펴면 아니, 책도 펴기 전부터 보기가 싫다던지, 공부시간이 늘어남에도 이해가 어렵고 연계가 잘 안 되던지 등), 합격 등 성과에 대한 명확한 의지와 각오가 있는지 등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에게 이야기할 것도, 정리해서 전달할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솔직한 대답이 필요한 단계다. 막연한 기대와 감정을 섞어서는 안 된다. 이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끄럽고 나태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 그 생활을 온전히 충실히 보내고 있을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본 결과 아직 공부시간이 부족하다거나, 방법론적 차원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좀 더 방법을 고도화하거나 개선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신이 그 목표한 바에 합당한 노력과 흥미와 재능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이제 멈춰 서서 과감히 내려놓을 때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2단계. 그렇다고 무작정 멈추기만 한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등을 깊게 성찰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흘러가고 이 순간에도 세상은 변해가며 우리는 또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데 마냥 멈춰버리기만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1단계에서 살펴본 본인의 성향, 의지, 관심사, 습관, 역량 등을 종합해서 자신이 진정하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에 합당한 진로나 경로를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고시생"에게 앞으로 먹고살 길이 있는데 몇 가지로 구분하면 고시 합격, 7-9급 합격, 공공기관 채용, 시험 관련 학원강사 등이 있다. 그 외도 있겠지만 그동안 해온 공부를 활용해서 가는 길들은 저 정도일 것 같다. 저런 진로와 경로들을 최대한 많이 찾아보고 자신에게 합당한, 그리고 내가 그래도 가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대안을 찾는 과정인 셈이다.


그렇게 대안까지 찾고 나면 최종단계다.

3단계.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과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인지하고 나면 이제 생각과 판단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변하는 게 있을 수 있지만 행동하지 않은 생각은 반쪽짜리도 되지 못한다. 시험에 계속 떨어지면 다른 길로 진로를 바꿔야 하고 어떤 것이 그래도 나은 것인지 정하고 나면 그 길로 발길을 옮겨 다시 걸어가야 한다. 마냥 그 길을 쳐다보고 있다고 해서 그 길로 걸어가지는 것이 아니다. 물가로 말을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결국 물은 말 스스로 마셔야 하는 것 아닌가. 상황이 정리가 되고 갈길이 정해졌다면 스스로 신발끈을 고쳐 매고 발을 옮겨야 한다. 그런 의지와 실행력을 갖추지 못한 각오와 판단은 공허할 뿐이다. 결국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단초는 자신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단계들을 지나서 다시 여정을 떠난 사람들은 꽤 금방 성과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진짜 한 끗 차이로 무엇인가 되지 않았던 것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물론 그 성과가 원래 기대했던 것에 비해 크지 않을 수 있지만 오랜 기간 열심히 목표를 위해, 미래를 위해 고전분투했지만 결국 전혀 움직이지 못한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에 놓인 자들에게 조그마한 성과와 성공도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가고 있는 길이 아니다 싶을 때는 너무 겁내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자기 스스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잘 살펴보자. 아니다 싶으면 아닌 것이다. 인생은 살아있는 한 계속 나아갈 것이고 우린 또 해낼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아닌 것에 집착하거나 매몰될 필요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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