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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 Oct 25. 2020

니체에게서 인생을 배웠다

고통은 운명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위버멘쉬. 아모르파티. 영혼회귀.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인생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왜 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등에 대한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에 휩싸인다. 사실 이런 생각은 삶이 힘들다 느껴질 때 더 격하게 역습하여 온다. 힘들다는 느낌은 굉장히 주관적인 감정이지만, 유병재가 했던 말처럼 나의 고통이 객관적으로 작다고 해서 나한테 주관적으로 작진 않다.



작든 크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이 나를 덮친다. 그것들은 대부분 예견되지 않은 것들이며,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며, 가끔은 너무 뜬금이 없어 어이가 없을 때도 있다. 어쩜 인생은 이다지도 나의 뜻대로 되는 일이 단 하나도 없을까.


서른하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살아온 나이. 나는 연륜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진짜 연륜 말이다. 그저 인생을 오래 살아서, 흐르는 시간이 쥐어준 형식적으로 쌓인 연륜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건 사고들에 부딪히고 실패하고 후회하면서 깨달은 연륜 말이다. 경험이라 하겠고, 지혜라고 부르겠다. 옛말에 어른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는데 그게 다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러 나온 조언이었으리. 물론 "라때는 말이야~!"라를 유행시키며 경험의 이야기들이 시대상에 못 맞물려 돌아가 고리타분함을 풍기면 아무리 깊은 뜻이 있는 이야기일지라도 그저 꼰대가 돼버리는 게 요새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크고 작은 여러 '어떡하지?'를 겪지 못한 지난날의 나는 참뜻을 몰랐다. 내 인생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잔소리쯤으로만 생각하고 '내 인생 내 뜻대로 살겠다는데 뭐?!'라는 어디 드라마에서 들었을법한 대사를 늘어놓으면 조언들을 흘려 넘겼다. 맞다. 내 인생이고 내 뜻대로 살아야 하는 건 지당하다. 인생은 오롯이 자신으로서 살아가야 하니깐.


하지만 지난날 나의 저 대사('내 인생 내 뜻대로 살겠다는데 뭐?!')는 지금 내가 말하는 이 대사(맞다. 내 인생이고 내 뜻대로 살아야 하는 건 지당하다)의 뜻과는 다르다. 지난날의 저 대사는 알맹이가 쏙 빠져 한없이 가벼웠다. 저 대사에 얼마나 많은 책임과 성찰, 고통과 눈물, 노력과 성취가 담겨있어야 하는지, 그간의 인생의 작고 큰 경험들로 알았다.




자연은 경이롭다


삶의 고통에서 배우는 것들


누구나 처음이 있다. 그 처음은 언제나 어렵다. 엄마의 뱃속에서 10달을 지내고 세상에 울음을 터트리며 태어난 자체가 처음이며, 뒤집기, 기기, 걷기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점점 청년이 되어간다. 그렇게 이 청년기부터 중년 사이의 경계에서 처음 맞는 고민들, 처음 맞는 감정의 요동들, 처음 맞는 온갖 삶의 풍파는 한 없이 혼란스러운 자아의 세계에 빠지게 하는 시기라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정해놓은 성인이란 나이가 되어 세상 앞에 진정으로 '홀로'서는 과정이기 때문이기에, 자신에 대한 '책임'이란 걸 알아가야 하는 가혹한 시기이기 때문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거센 풍파 속에서 누구나 그렇듯 고통이 생긴다. 크고 작든 슬픔, 고통, 아픔이 생겨나 생채기를 남긴다. 나에게도 삶의 아픔이 있다. 구구절절 나열할 수 없는 그 아픔을 처음 맞딱 뜨렸을땐 그냥 원망을 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어린 날의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대가는 컸다. 그저 부정적이었고, 남 탓을 했으며, 끈기도 없었고 딱히 목표도 꿈도 없으니 노력도 없었다. 그리고 고통이 찾아왔을 땐 내 운명을 정말 지독하게도 탓하며 모든 게 무서웠다. 정말 지독하게도 나의 운명을 탓했다. 사고가 좁았던, 준비가 안되어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원망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내 감정쯤이야 어떻든 시간은 아주 잔인하게 흘러간다. 이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건 죽음뿐이었지만, 죽을 용기가 어디 쉬운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론 곪아 갔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심리적으로 최고로 불안한 그 시절에 역설적이게도 나는 성장했다. 백신을 맞는 건 그 균을 도포하여 내성을 만들기 위함이다. 백신처럼 나의 곪은 상처 자국이 내성을 만들어 주었고, 끝없이 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고통은 성장이었다. 이 개념을 니체의 삶에서 엿볼 수 있었다.




니체의 삶


니체의 삶


내가 본 니체의 삶은 외롭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당연히 기독교 목사가 되는 삶을 그리며 성장했다. 집안 이력의 원인모를 유전적 병이 있었고, 니체도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할 거라는 예감을 하며 살아갔으며 실로 그는 평생이 아팠다. 그가 잠언을 자주 쓴 것도 너무 아파서 오랜 시간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움부르크의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여 아버지의 뒤를 밟으려 했지만, 그는 반기독교적 사고에 눈을 떠 신학 공부를 관두고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입학하여 고전문헌학을 공부하고 교수도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를 알게 되고 영감을 받아 철학자가 되기로 한다.


바그너와 니체


니체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바그너에게도 영감을 받아 <비극의 탄생>, <반 시대적 고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여명>, <즐거운 학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등의 책을 냈지만 그의 책은 그가 온전한 정신일 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니체가 점점 미쳐가던 시기가 되어 판단력과 언어 능력을 모두 잃고 나서야 유럽을 휩쓴 아방가르드의 열기로 그의 책들이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자신을 돌봐주던 어머니가 사망 후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문서 보관소를 세우고 니체의 철학과 정 반대의 길을 가던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치즘 아래 왜곡된 해석으로 이용되게 하였다.


p.341


1900년 8월 25일. 그렇게 평생을 병과 싸우고 죽기 전 11년은 정신병으로 미쳐 살았으며, 살아생전 온전할 때엔 인정받지 못한 철학이 죽고 나서야 시대 흐름과 맞물려 위대해졌으나 잘못된 방향으로 퍼지기도 했던 그의 삶은 너무 외롭다. 쓸쓸하게 느껴졌다. 끝없이 병과 싸우며, 사랑하는 여인과 여동생에게조차 이용당하며 그렇게 쓸쓸히 마감한 니체의 삶은 니체의 삶이었기에, 자신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사상들을 깨닫고 세상에 남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 혹은 누군가도 살아가면서 겪은 여러 고통의 경험들이 있었기에 삶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한 사람의 전기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지표이다.





내가 느낀 깨달음들.


고통 속에서 나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배워가고 있는 내가 그렇다고 지금 뭐 대단한 성찰로 결과들을 만들어 낸 건 아니다. 하지만 아직이라고 말하고 싶다. 분명한 건 나는 더 단단해지고 있다. 나에 대한 오만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독히도 주변의 환경들과 내 기분에 왔다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반복하며 왜?라는 물음의 답을 찾으려 애쓰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찾아온다. 분명 답이 되어줄 새로운 세계들이 우연을 가장해 나에게 찾아온다. 그것은 지금 나의 고민에 딱 들어맞는 책일 수도 있으며, 우연히 본 커뮤니티의 구절이나 유튜브 영상일 수도 있으며, 어쩌다 마주친 은인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성찰 또한 노력이다. 왜라는 질문에 스스로가 답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꾸준히 일기를 쓰던, 책을 찾아 읽던 명상을 하던 미라클 모닝을 하던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던. 좋다던 모든 것들을 시도해보며 노력을 들여 나를 알아가야 한다. 니체가 고통스럽고 힘든 병이 있었기에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듯이, 그렇게 성찰의 단계를 밟아가다 보면 나에 대해 알게 되고 내 인생의 이유들을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그 이유들을 향해 살고 싶어 진다.


아모르파티


결국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살아가는 내 인생은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 삶을 살아갈지, 그러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꾸준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감에 있다. 고로,



1. 준비되어 있는 내가 되길.

끝없는 자기 성찰의 노력으로 나를 알아간다.(메타인지) 되고 싶은 나를 그린다. 삶의 목적과 목표들이 생긴다. 고통이 성장인 걸 알아간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기초 체력을 쌓아 올려간다. 그러다 보면 살고 싶은 인생의 그림이 더 확고해진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쓰고, 답을 찾아 나서 행동하자.  


2. 나를 보살피는 건 나였다.

세상에 태어나 늙어 눈감는 순간까지 인생을 함께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 하나뿐이다. 나는 나한테 친절해야 했었다. 부정과 혐오만 잔뜩 안은채 스스로를 방치했다. 방치는 답이 아니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죽음의 문턱까지 언제나 늘 그 어떠한 변수나 배신 없이 함께하며 나를 보살피고 다독여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끌어주는 존재. 나는 나한테 친절해야 한다.


3. 사랑하는 인생을 선택하자.

내적이든 외적이든 운명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현재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배워야 한다. 데이터를 쌓고, 방법을 찾아 행동하고 성취하여 진정으로 내가 나를 채울 때. 그때 나는 사랑하는 나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다.



방법을 찾고, 끝없이 나를 다독이며 나와 인생을 살아가는 것. 고통은 운명이다. 너 자신이 돼라.



이번 책으로 니체의 삶을 만날 수 있어 감사했고, 그가 살아온 과정에서 만들어진 그의 사상과 철학을 21세기에도 물려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여전히 나는 배우고 깨달으며 나를 찾는 본질을 실현하며 살아가고 싶다. 오늘도 온전한 내가 되어 사랑하는 나의 인생을 위해 살아가야겠다 다짐한다.



" '신은 죽었다.' 그는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당연한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지 못하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동안 누구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진실을 말하고자 하였다....(생략) 하지만 니체가 본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해 자신들이 믿어온 진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따르는 우상에서 진실한 소리가 울리는지 망치를 휘둘러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p624~625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자기혐오와 르상티망 같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인간은 마침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룬 위버멘쉬로서 진정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이 세상의 목적에서 즐거움을 찾고, 존재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끼며, 삶의 유한함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p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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