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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불가능한 기억들의 이어쓰기

by 달로

재현 불가능한 기억들의 이어쓰기

-한강, <소년이 온다>



한강(1970)은 『희랍어』(2011) 이후 “인간의 깨끗하고 연한 지점을 응시하는 아주 밝은 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자신이 유년기에 5․18에 대한 간접경험으로 이미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음을 깨닫고 “이 이야기를 뚫고 나아가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겠다”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실존적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직면을 결정한다. 그리고 유년에서 시작된 한계 앞에, 자신 세계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을 꺼내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 세운다.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년이 온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자가 등장한다. 1장 <어린 새>에서 존재를 알 수 없는 화자는 상무관에서 시신 수습을 돕는 동호를 ‘너’로 호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의 ‘너’라는 호명에 독자들은 수십 년의 시공간을 넘어 1980년 5월 18일에 당도한다. 그 순간 ‘너’는 ‘나’가 된다. 소설과 동행을 시작한 ‘나’는 동호가 어둑한 체육관에서 시체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초를 켜며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p.13)라고 생각할 때, 이 여정이 일렁이는 촛불에 비친 혼들과 함께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2장에서 6장까지 일종의 증언 형식으로 발화되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는 ‘시차’를 두고 펼쳐진다. 동호가 등장하는 1장 <어린 새>와 동호의 친구 정대의 혼이 등장하는 2장 <검은 숨>은 1980년을, 동호와 함께 시신 수습을 도왔던 은숙이 검열과 심문에 괴롭힘 당하는 3장 <일곱 개의 뺨>은 1985년을, 상무관에서 시신 수습을 총괄하던 진수와 함께 고문을 당했던 교대 복학생이 진수에 대해 회상하는 4장 <쇠와 피>는 1990년을, 노동운동 전력으로 인해 빨갱이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하고 환경단체에서 존재를 숨긴 채 살아가는 선주의 이야기 <밤의 눈동자>는 2002년을, 동호 어머니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마지막 6장 <꽃 핀 쪽으로>는 2010년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실제 작가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에 이르러서야 2013년을 맞이한다.


시차는 왜 발생하는가? 동일한 ‘사건’을 함께 경험한 이들은 왜 분리된 시공간에 놓이는가? 앞서 5․18이라는 이야기를 뚫고 나가지 못하면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던 작가는 증언자들의 고통 앞에서 애초에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세계가 재현(증언)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편집자 은숙이 검열로 인해 검은 숯덩이가 된 원고를 받던 순간처럼, 모든 기록과 기억을 동원해도 절대적으로 완벽해질 수 없는 세계ㅡ가시화될 수 없는 세계 앞에 놓인다. 그래서 작가는 오히려 모든 것과 멀어지길 선택한다. 상무관에 모여 있던 인물들을 각기 다른 시간으로 이동시키고, 각자의 삶으로 떨어뜨려 놓는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p. 79)로 시작되는 지워진 문장들을 드문드문 더듬어 나가듯, “거칠게 꿰매어진 문장들, 문단 째로 검게 지워진 자리들”(p.79)을 멀리 떨어진 인물들에게서 하나씩 찾아 나선다. 각 시대를 표상하는 20년이라는 시차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듯 기억을 이어간다.


시공간의 차이는 소설 형식의 변주로 이어지며 독자들에게 다층적인 시선을 제공한다. 1장 <어린 새>가 모든 인물을 현재 시점으로 등장시켰다면, 2장 <검은 숨>은 영혼으로 나타난 정대의 독백으로, 3장 <일곱 개의 뺨>에서는 삶으로 흩어진 은숙이 나타나 자신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이어 4장 <쇠와 피>과 5장 <밤의 눈동자>는 교대 복학생과 선주가 논문을 쓰는 ‘윤’의 증언 요청에 답하는 방식으로 서술되며 이전 장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차이라는 변화는 독자들에게도 주어진다. 증언을 요구하는 윤의 존재는 이미 ‘너’라는 대명사로 호출된 독자들에게 ‘탐문자’이자 ‘기록자’라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6장 <꽃 핀 쪽으로>는 동호의 엄마가 ‘너’(동호)에게 보내는 후일담 편지의 형식으로,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는 소설의 작업과정을 작가의 말이라는 형식으로 대신하며 차이를 반복한다.


반복되는 차이 속에서 증언 불가능성은 다양한 ‘고통’을 가시화한다. 선주가 윤의 증언 요청에 휴대용 녹음기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시간은 마치 녹취록의 타임코드처럼 표기되며, 이미 증언된 세계와 증언되지 않은 세계 사이에 놓인 ‘증언의 공백’을 기록한다. 초저녁 선주의 사무실에서 시작된 시간은 꿈처럼 광주로 향하고, 성희 언니에 관한 기억으로 향한다.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 광주와 장례식장을 넘나드는 기억의 분투는 연속으로 흐르는 시간(타임코드) 속에서 증언하는 자의 고통을 생생히 보여준다. 소설 속 등장하는 몸에 관한 서술도 마찬가지다. “몸들의 높은 탑 아래 짐승처럼 끼어 있는 내 몸이 부끄럽고 증오스러웠어.”(p.53) 이미 혼이 된 정대는 자신에게서 분리된 몸의 형체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고통을 느낀다. 은숙의 ‘부풀어 있는 뺨’과 진수의 ‘하얀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짓이겨진 손가락’, 고문을 당하던 순간 “몸이 사라져 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p.121) 바라던 교대 복학생의 간절한 외침은 생존자들의 겪어야 했던 고통과 살아남은 자의 치욕을 배가시키며, 피해자들의 고통이 절대적으로 공유될 수 없는 것임을 확고히 한다. 이처럼『소년이 온다』는 재현(증언) 불가능한 상태의 가시화를 통해 재현(증언)된다.


증언 불가능성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인물들의 세밀한 기억이다. 특히 소설에 살아 등장하지 않는 인물 정대와 진수에 대한 회상이 그렇다. “늦은 밤 창문으로 불어오던 습기 찬 바람, (중략)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p.55)이 부재하는 정대를 현존하게 한다. 모나미 볼펜과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p.122)이 진수를 기억하게 한다. 한 인간에 대한 기억은 거대서사가 아닌 오히려 작은 사물과 작은 순간에서 생존의 힘을 얻는다. 하지만 작가는 쉽게 낙관하지 않고 윤의 자리에 놓인 독자에게 다시 반문한다. “선생이 쓰려고 하는 그 논문은 선생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p.108),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p.132),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p.155)라고 교대 복학생은 윤에게 되묻고, 선주 또한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p.166) 라며 재현(증언) 불가능함에 대해 끝까지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가 다양한 차이 속에서도 동력을 얻는 것은 소설이 그리는 이미지의 중첩에 있다. 동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친구 정대는 겹겹이 쌓인 ‘탑’이 된 몸으로 등장해 혼이 되어 감각하는 것들에 대해 독백한다. “처음부터 함께였던 그림자와 새로 온 그림자가 나란히 내 그림자에 겹쳐질 때”(p.60) 정대는 그림자가 가진 고통을 생생히 전달받는다. 3장 <일곱 개의 뺨>에서는 은숙이 맞는 ‘뺨의 대수’로 육체의 고통을 쌓는다. 기억의 고통을 쌓는다. 이어 선주는 한 겹의 꿈을 열고 나오면 깨어나는 대신 다음 겹의 꿈으로 스며들어가고 마는 ‘시간의 축적’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온다. 작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p.174) 몸과 기억, 그리고 꿈과 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쌓이고 겹쳐져 현재의 우리에게 도착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1장에서 6장까지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1장을 중심으로 교차되거나 어긋나며 블록을 형성한다.


작가는 “이 책은 나를 위해 쓰지 않았다. 다만 나의 감각, 감정, 몸, 삶을 그들에게ㅡ살해된 자들, 살아남은 자들, 혈육을 잃은 자들에게ㅡ빌려주고 있었다.”고 말하며, 『소년이 온다』는 작가가 당도한 한계점 앞에서 누군가의 대리인이 되어 실행한 일종의 ‘제의’와 같음을 고백한다. 검열로 원고에서 지워졌으나 다시금 무대에서 인간의 ‘입’을 통해 되살아나는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p.102)라는 초혼(招魂)은 제사장이 된 작가와 함께 독자를 제의의 참관자로 불러오고, 이 소설을 하나의 거대한‘광장’으로 만든다. 5.18 유족에게“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p.211) 라는 책임을 부여받는 것은 작가뿐만이 아니다. 6장 동호 어머니 이야기로 끝날 줄 알았던 소설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시작되는 것은, 동호라는 ‘허구’의 인물에게서 시작된 독자의 자리를 ‘현실’ 속 개인으로 확장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작가의 필연적 선택이자, 윤리적 시도다.


5.18에 관한 어른들의 풍문 속에서 자신이 살았던 옛집을 떠올리며 광주를 찾은 작가는 바닥이 파헤쳐진 상무관에 서서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질 때까지,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서 있겠다고 다짐한다. 작가의 결연한 의지는 동호, 진수, 은숙, 선주를 통과한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p.116) 그곳에 ‘어쩔 수 없이 이제 온’ 독자들에게 끝내 닿게 한다. 작가의 말처럼 『소년이 온다』는 독자들에 의해 완성되는 소설이다. 그래야만 4.3 사건의 희생자들이, 동일방직의 여성들이, 용산의 망루가, 세월호의 아이들이“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p.174) 더 이상 희생자라는 이름이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 지금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다양한 형식적 차이와 반복을 통해 재현(증언)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문학적 ‘광장’을 재현한다. 작가는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p.95)라는 거대한 물음을 던진다. 동호는‘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꽃이 핀 밝은 곳으로’, ‘캄캄한 곳이 아닌 밝은 곳으로’ 가자고 우리를 이끈다. 밝은 곳이란 어떤 곳인가? 그것은 동호가 시체들이 쌓인 상무관에서 켠 촛불을 날개 같이 파닥이게 하는, 작가가 소년들의 무덤 앞에서 마주한 촛불을 파닥이게 하는, 누군가의 ‘혼’이 우리가 밤새워 든 촛불의 가장자리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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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부터 2025년 1월까지, 어린 소년을 생각하며 살았다. 어린 소년은 동호이기도했고, 나의 옛적 어린 소년이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으로 완성 됐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온다>가 현실에 의해 갱신되는 과정이 나의 소년을 깨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오늘은 입춘(立春)이다. 입춘에는 ‘入’(들입)자를 쓰지 않고 ‘立’(설립)자를 쓴다. 그래서 또 다짐한다. 동호에게도 옛적 나이 어린 소년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고. 봄에게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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