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서>(2006), <영매>(2003), <만신>(2014)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이’(between)라는 말은 어떤 사람과 사람, 물체 혹은 공간 사이의 거리나 존재감을 나타내는데, 이는 언제나 특정한 두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처럼 서로 유사한 두 존재부터 양극단에 놓인 신과 인간, 이승과 저승, 현실과 비현실 등이 모두 이 ‘사이’를 가능케 한다. ‘사이’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가능한 현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에서’라는 특정한 지점을 덧붙여 보자. 사이에서. 왜 <사이에서>(이창재, 2006)인가. 우리는 단말마 같은 이 제목에서 영화가 어떤 두 존재의 사이에 놓인 ‘어떤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지점은 신과 인간의 사이(between)에 끼인 존재이면서도 신과 인간 양쪽이 모두 아닌(betwixt) 존재, 바로 ‘무당’이다.
영화 <사이에서>는 <길 위에서>, <목숨> 등 감독 스스로 ‘존재의 간극 3부작’이라고 명명한 3편의 다큐멘터리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사이에서>는 무당 이해경을 주축으로 27살의 인희가 내림굿을 받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30년간 무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신을 거부했던 손영희, 어린 나이에도 귀신을 본다는 8살 동빈이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구성한다. 영화는 동이 터오는 바닷가에 앉은 두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자신에게 찾아온 신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희(이해경의 신딸)와 그 옆에서 그런 인희를 다독이며 이끄는 무당 이해경. 어둠이 점차 옅어지고 해가 떠오르는 동안에도 인희는 자신의 운명과 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사지를 떨며 눈물 흘린다. 그리고 그런 인희를 보며 이해경 또한 고통스러워한다. 이처럼 영화는 처음부터 ‘신들린 사람’이라는 (운명을 가진) 위치에 선 인간의 ‘접신의 순간’과 ‘접신의 과정’, 그리고 그 ‘고통’에 집중한다. 등장인물인 황인희, 손영희, 김동빈은 모두 신내림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신병 때문에 내림굿을 받아들이게 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신내림을 주관하는 이해경 또한 영화 속에서 과거 자신 역시 신내림의 과정이 거부하고 싶은 고통이었음을 자주 언급한다.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접신의 순간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내림굿 과정에서 이 장면들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그중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내는 것은 음악(리듬)이다. 내림굿은 신내림을 받는 사람의 접신을 돕기 위해 징, 장구, 방울 등의 악기를 반복적으로 연주하는데, 접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리듬이 빨라지고 강렬해진다. 영화는 이 리듬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신내림이 행해지는 현장의 흥분과 열기를 전하고자 애쓴다. 촬영 또한 기본적으로 인물과 사물에 대한 과감한 클로즈업을 빈번히 사용하며, 굿판에서는 필름의 스피드를 저속으로 변경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등 관객이 접신의 과정에 좀 더 몰입하게끔, 아니 빨려 들어가게끔 의도하고 있다. 영화에서 굿을 통해 나타나는 접신의 과정은 현란하고 화려하며 신비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땀과 눈물이 범벅되어 육체를 뒤덮을 정도로 슬프고, 괴롭게 보이기도 한다. 감독은 관객이 내림굿의 과정을 ‘관람’하는 것이 아닌 ‘체험’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사이에서>는 내림굿의 강렬함과 신비성을 전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관객에게 굿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굿이 가지는 다양한 형태와 형식 특히나 굿의 예술적인 측면을 설명하는 일에 큰 관심을 쏟고 있지 못하고 있다. 또한 무당을 삶의 조언자라고 언급하면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당 이해경 개인의 삶과 이해경이 굿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여러 인간관계는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이해경이 타살감흥굿을 행하면서 돼지피에 얼굴을 박고 먹는 장면이나, 이해경의 신아들이 생타살굿을 행하면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는 장면 등 무섭고 야만적인 이미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며, 무속이 가지는 선입견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손에 새겨진 손금을 보여주며, 이것이 신이 신내림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에게 그려놓은 숙명이라고 재차 강조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러 질문이 머리를 스쳤지만 근원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의문은 ‘왜 이 영화는 무당의 고통에 집중하는가’이다. 왜 그들의 고통이 집중되어 드러나야 하고, 관객은 그것을 어떤 이유로 수용해야 하는가. 아쉽게도 <사이에서>는 그 의문에 상세한 답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의문들은 무당에 대해 다룬 다른 2편의 다큐멘터리, <영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박기복, 2002), <만신>(박찬경, 2014)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영매>는 세습무와 강신무를 비교하면서 한반도에 자리 잡은 무신 풍속을 탐구한다. 큰언니부터 막내까지 4자매가 무당인 채씨 자매(진도 씻김굿 세습무)와 농사일로 고된 삶을 사는 와중 한 맺힌 엄마 몸신이 들어와 괴로워하는 박영자(진도 강신무), 그리고 엄마에게 내림굿 받은 딸 박미정(황해도 굿 강신무)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영매>는 여러 인물을 따라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풍속으로서의 ‘무’를 설명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세습무(신내림을 받지 않은 자가 부모로부터 신분을 물려받은 무당)와 강신무(신내림 무당)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각각의 무가 어떤 형태와 색깔을 띠고 진행되는지 마치 수집가와 같은 태도로 영화의 사료적 가치를 높여낸다. 또한 민초들의 삶 속에서 무당이 그들의 조언자로서 이웃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점은 (영화의 부제에서 나타나듯) 죽은 자를 불러내는 자와 죽은 자와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무당 자매 중 동생 채정례는 먼저 세상을 떠난 언니 채둔굴을 안타까워하며 영혼을 위로하는 굿을 올리고, 박영자 무당의 엄마 몸신은 남의 굿을 하던 중 갑자기 나타나 딸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는다. 박미정 무당은 자신이 신을 받아들인 이유가 엄마와의 해후를 이승에서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매>는 ‘무당’이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을 ‘인간사’를 바탕으로 접근하면서 영화의 목적과 근거를 명확히 한다.
이와는 또 다르게 영화 <만신>은 재연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혼합된 방식을 통해 만신 김금화(김금화는 이해경의 신어머니기도 하다)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준다. 김금화의 유년시절 신병에 들린 모습은 김새론이, 신내림을 받는 과정은 류현경이, 중년에 나라만신이 되는 모습은 문소리가 연기한다. 여기에 실존하는 김금화가 중간중간 등장해 회상 형식으로 이야기를 덧붙여 가는 독특한 방식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방식은 3명의 배우와 김금화의 출연이 하나로 드라마로 통합되지 않고 에피소드화 되어 보이게 된다. 이것은 이 영화가 김금화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적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통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분단, 새마을 운동과 같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현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사용되는 ‘재연’은 인물의 시간을 설명하는 듯 보이면서도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이중적으로 ‘이용’된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것은 이런 구성이 시대별로 무당이라는 존재의 위치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보여준다는 점이다. 때로는 귀신보다 못한 존재로, 때로는 빨갱이로, 국가의 무당이자 예술인으로-만신 김금화의 삶은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요동치며 격변의 세월을 마주한다. 또한 <만신>은 앞선 두 영화보다 무당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예술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는 서해안 풍어제에서 나타나는 황해도 굿의 익살스러운 연기와 풍자, 그리고 다양한 서사와 춤 등이 집중적으로 분석된다. 더불어 이혼한 남편과의 재회 장면 등을 통해 짧게나마 인간 김금화의 사적 세계를 들여다보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비평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사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 ‘무당의 삶’과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해 온 ‘삶의 조언자’로서의 ‘무당’을 담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을 위해 영화는 다양한 요소들을 활용해 ‘무당’이라는 존재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사이에 선 존재로서의 무당은 신과 인간 어느 세계에도 마음을 편히 내주지 못하고 고통받는 존재로 그려진다. 왜 감독은 ‘무당’이라는 존재를 선택했을까.(*2000년대 초반 다큐멘터리 개봉작이 5편도 되지 않던 시기에 ‘무당’을 소재로 한 영화가 2편이나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배경 분석의 필요성을 갖게 한다.) 이 질문은 서론에서 잠시 거론한 왜 <사이에서>인가, 라는 질문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사이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 이 질문이 너무 어렵다면, 앞서 살펴본 <사이에서>, <영매>, <만신>을 돌아보자. 신과 인간,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세계에서 죽은 자들은 언제나 ‘산 자’들에 의해 소환되고, 영화는 산 자들을 위한 굿판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산 자’들의 삶을 더 견고하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