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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이면의 ‘선택’에 관하여

빨간벽돌| 2017 | 주현숙 | 100분 | 다큐멘터리

by 달로

우리가 무언가 선택할 때, ‘선택’이라는 단어의 긍정적인 느낌과는 다르게 우리는 무언가를 포기하게 된다. 선택의 순간, 선택된 목표가 바로 획득되지 않는 것에 반해, 선택되지 않은 목표는 바로 상실된다. 그래서 선택은 항상 어떤 두려움을 동반한다. 영화 <빨간벽돌>은 개인들에게 무수히 주어진 그 선택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두려움을 담아낸다.


1976년 동일방직 누드시위사건, 1979년 YH무역 농성사건, 그리고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이르기까지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에는 늘 여성들이 있었다. 자신의 미래 대신 ‘오빠’ 혹은 ‘동생’이라는 호칭으로 명명되는 누군가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가족’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본질의 생사를 위해, 어린 나이에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수많은 여성들. 그녀들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그로 인해 가족은 가난을 버틸 수 있었으며, 국가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운동사 속 여성의 존재다. 그녀들은 ‘여성’ 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존재로 화석화되었고, 역사적 사건에서 여성노동자의 이미지는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소비되어왔다.


이에 저항한 다큐멘터리들, 동일방직 사건을 통해 여성노동자의 삶과 역사를 다룬 <우리들은 정의파다>(2006, 이혜란), 구로공단-기륭전자-까르푸-홈에버-삼성반도체 백혈병 노동자에 이르는 한국 여성노동자의 역사를 넘어 베트남, 캄보디아까지 연결되는 전 지구적 여성노동의 스펙트럼을 담은 <위로공단>(2014, 임흥순)은 그동안의 기계적 기억방식과 다른 측면에서 ‘사건 너머’의 여성의 삶과 생각을 돌아본다. 하지만, 이와는 또 다른 결에서 영화 <빨간벽돌>은 당시의 사건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의 존재에 새로운 의구심을 품고, 구로동맹파업 속 여성들을 찾아 나선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녀들은 어디쯤에 있을까.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제복이 너무 멋져 보여 공장에 들어오게 됐다”는 여성, “봄바람이 불면 공장 앞에 피던 아카시아 냄새가 황홀했다”는 여성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새로 봄’을 경험한다. “노동운동이 너무도 하기 싫어 결혼을 선택했다”는 여성의 인터뷰 또한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던 여성노동운동의 새로운 결을 발견하게 한다. 자신이 속한 거대한 사회구조와 대의라는 명분 앞에 숨겨야 했던 개인의 삶과 선택. 때문에 영화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당시 사건 당사자들의 상황과 감정의 기억을 따라 서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관객은 그녀들이 선택한 것 이면의 선택을 마주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 다른 한 축에는 현재를 사는 청년의 삶이 있다. 지속되는 경제 불황에 따른 고용불안, 미래에 대한 절박함 속에서 스스로가 쌓아 올린 존재의 의미 대신 사회가 만들어놓은 존재의 위치를 획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들. 감독은 자칫 윤리적 문제로 부각될 수도 있을 만한 질문과 상황으로 청년들이 가진 문제에 관객을 동참시켜 직면하게 한다. 청년들은 언제나 그랬다는 듯 자신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묵묵히, 최대한 성실히 수행하려 한다. 그리고 그중 누군가는 송곳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진 불합리함을 이야기하고 다른 방법을 함께 찾자고 권유하기도 한다. 이 상황은 30년 전 구로동맹파업의 당사자들이 느꼈을 사회구조의 압박과 그로 인한 불안의 경험을 다시 환기하며, 각기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던 두 주체를 조우하게 한다.

<빨간벽돌>은 오랫동안 노동자의 삶을 쫓아 작업해온 감독의 내공과 연륜, 그리고 최근 급변하는 다큐멘터리의 새로움에 다가서려는 시도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또한, 과거를 기록하고 정리하여한다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책무와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감독이 느끼는 미래 세대들에 대한 부채감이 공존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은 그 사이에서 또 어떤 것들을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 우리가 무언가 선택할 때 느끼는 감정은 설렘보다 두려움에 가깝지 않은가.


영화는 한 소절의 노래에 ‘왜 사느냐’는 거대한 질문과 스스로 ‘살아있음’을 동시에 담아내는 한 여성의 인터뷰에서 끝이 난다. 나는 영화 속 여성들이 그때는 그러지 못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에서라도 ‘그때 나는 무서웠고, 두려웠고, 하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해주어서 참 고마웠다. 비록 우리 앞에는 선택할 수 없는 현실이 수없이 펼쳐져 있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녀들처럼 언젠가 모두에게 각자가 한 선택들에 대해 말할 기회가 찾아왔으면 한다. ‘선택’ 이면의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도래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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