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의 청년 노숙자 시절을 마무리 지으며.
나의 청년 노숙자 시절이 끝난 날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2020년 8월 28일이었다. 당시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는 물론 대한민국까지 강타한 시점이었다. 청년 노숙자였을 당시 나는 낮에는 서울역에서 음식을 얻고 잠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잤다. 그러다 보니 인천국제공항 경찰대와 일종의 악연이 있다. 심지어 다시 찾아온다면 때려도 좋다고 말하는 영상까지 경찰대의 협박으로 억지로 찍어야 했다. 노숙자라고 해도 그런 식의 폭력적인 행동을 자행한다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2020년이 되자 나도 엄청나게 고생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집에서 지냈었기 때문에 2019년에 비하면 음식을 얻지 못해 굶는 날이 많아졌다. 노숙자가 음식을 얻기 위해서는 조건이 꽤 까다로웠다. 일단 되도록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음식을 얻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외출하지 않게 된 2020년 2월부터는 확실히 굶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숙자에게 굶는 경험은 정신적으로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물론 구걸이라는 방식도 있지만 내가 지킨 것은 바로 구걸하지 않는 것이었다. 구걸이라는 것 자체가 여러모로 정신적인 타격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들과 돈을 모을 수 있는 확신이 없는 상황이 더해지니 그럴 바에는 구걸 대신 내가 스스로 음식을 구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자존감을 잃어버릴 일을 없애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주로 내가 서울역에서 얻은 음식은 간단한 버거 종류부터 시작해서 운이 좋으면 본도시락까지 얻을 때가 있었다. 애당초 노숙자가 음식을 얻을 수 있을지는 복불복인 만큼 진짜 운이 나쁘면 음식은커녕 굶주림에 시달리며 일명 생체시계라고 불리는 ‘꼬르륵’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다. 진짜 꼬르륵 소리를 듣는 경험은 비참함을 느끼기 딱 좋은 경우였다. 그러다 보니 2020년의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굶는 날이 많아졌다.
게다가 이제 웬만해서는 마스크 필수 착용이었기 때문에 마스크를 잃어버리거나 너무 오래 써서 더러워져서 더는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노숙자 쉼터 같은 곳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마스크를 얻어서 새로 착용해야 했다. 이렇게 마스크가 필수가 된 시대라서 사람들은 표정을 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눈만 보이기 때문에 표정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경우마저 사라져 버린 암담한 시절이었다.
2020년 8월 28일의 나는 이때 결심했다.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밖으로 잘 안 나가고 그 때문에 굶어야 하는 날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노숙자 센터의 도움이라도 받자. 나는 이렇게 생각한 뒤 우대권을 발권해서 충정로역 근처에 위치한 브릿지센터에 갔다. 브릿지센터에 도착한 이후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은 뒤 1층의 휴게실에서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원의 안내에 따라 3층의 심층상담실로 갔다. 심층상담실에는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나는 남자 직원에게 아버지의 아동 학대를 피해 5년 동안 청년 노숙자로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 굶는 날이 훨씬 많아서 더 늦기 전에 청년 노숙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솔직하게 심정을 말했다. 그렇게 말하자 남자 직원은 내게 임시 주택을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임시 주택은 말 그대로 내가 임시로 지낼 주택을 브릿지센터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남자 직원 분은 자신의 조카 이름이 형준으로 나와 이름이 정확히 똑같다고 말했다.
이후 과정은 순조로웠다. 일단 술과 담배를 하는지 물었다. 하지만 나는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가지를 하고 있으면 임시 주택에서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으니 사전에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이후 임시 주택에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적어놓은 서약서를 받은 나는 바로 사인을 하며 임시 주택 입주가 확정되었다.
이후 남자 직원 분과 함께 서소문 건널목을 건너서 도보로 23분 정도를 걷으니 허름한 4층짜리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3층에는 내가 당분간 지내게 될 고시원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지금은 폐업이기 때문에 고시원의 이름을 말한다면 ‘엘리트 고시원’이었다. 1층에는 배스킨라빈스 독립문점이 있었다. 2층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비인후과가 운영 중이었다. 남자 직원과 나는 계단을 올라 3층에 도착하고 나서 남자 직원이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고시원 안에 들어간 나는 고시원 총무와 만나게 되었다. 고시원 총무는 4층에 위치한 부엌부터 보여줬다. 부엌에는 식당에서 주로 보이는 커다란 밥통이 있었고 밥은 넉넉하게 있었다. 심지어 라면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낼 방도 보게 되었다. 방은 간단했다. 아주 작은 TV와 누워서 잘 수 있는 침대, 간단한 수납이 가능한 수납장, 선풍기, 옷걸이가 전부였다. 딱 잠을 잘 공간만이 존재하는 셈이지만 나에게는 이조차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남자 직원은 다시 브릿지센터로 돌아가기 위해 나와 헤어졌다. 이후 고시원 총무를 통해 전입신고에 필요한 고시원 영수증을 받았다. 고시원의 경우 전셋집이나 아파트, 단독주택과 달리 누가 어디에 사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서 영수증은 필수였다. 이후 엘리트 고시원에서 불과 도보로 5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는 천연동 주민센터로 갔다. 여기서 전입신고서와 고시원에서 받은 영수증을 제시했다. 주민등록증은 이미 분실했기 때문에 지문으로 본인인증을 마쳤다.
이후 과정은 순조로웠다. 전입신고를 마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직원은 공식적으로 이제 세대원이 아닌 세대주가 되었다고 말했다. 내게는 다행인 소식이었다. 실제로 1차 긴급재난지원금 당시의 나는 세대주가 아닌 세대원이라는 이유로 긴급재난지원금을 한 푼도 못 받았다. 그런데도 아동 학대를 한 아버지는 세대주라는 이유로 긴급재난지원금을 받는 사회의 부조리를 또 한 번 겪어야 했었다.
다시 5분 정도를 걸어서 엘리트 고시원에 도착한 나는 내가 지내게 될 방의 호수인 10번이라고 적힌 판넬을 바라본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게 있어서 5년간의 경험은 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추억 중 하나였다. 굳이 말하면 부정적인 의미의 추억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으니 득과 실이 있었던 셈이었다. 잠시 방에서 휴식을 취한 나는 방에서 나가서 4층의 부엌으로 가서 진라면 매운맛을 끓어서 먹고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길었던 청년 노숙자에서 벗어난 오늘을 기념해서 방 사진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때의 경험은 진짜 너무 뿌듯했다.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피날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사진을 찍는 순간에 나는 마침내 청년 노숙자에서 한 명의 서울 시민이 되었다. 그렇게 서울 시민이 된 나는 이런 뿌듯한 감정을 품은 상태로 처음으로 침대와 이불이 있는 임시 주택에서 서울 시민으로서의 첫 번째 밤을 보내기 위해 불을 끄고 이불을 몸에 덮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P. S. 나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안한 ‘청년 노숙자 대상 정보제공 및 상담 지원사업’을 통해 서울창의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청년이 노숙자로 전락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너무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앞으로는 청년이 자신의 꿈을 채 다 피기도 전에 노숙자라는 이름으로 쓸쓸하게 사라지는 상황만은 사라지길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