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형준 작가 Oct 18. 2024

대한민국 사회 속 부조리

내향성 발톱과 나의 치열한 사투

 나는 꽤 큰 고난을 겪고 있었다.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기 직전인 2019년이자 청년 노숙자로 살아간 지 4년 차가 된 해였다. 아무래도 청년이 노숙자가 된다는 것은 여러모로 비극이었다. 노숙자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필수 요소인 의식주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사람들의 비난 섞인 눈빛과 폭언을 오로지 혼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나에게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찾아왔다.


 나는 내향성 발톱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내향성이라는 말을 듣고 뭔가 퍼뜩 떠올린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증상이다. 정상적인 발톱은 살을 덮는 수준으로 있지만 내향성 발톱이 발생하면 살을 파고드는 발톱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걸을 때마다 통증이 생겨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열 발자국을 걸으면 바닥에 앉아서 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나의 내향성 발톱은 오른발 엄지발가락이었다. 내향성 발톱의 90%가 엄지발가락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특이한 경우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통증 정도였고 지금처럼 걷는 걸로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때 돈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당연히 치료에는 비용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이때의 나는 내향성 발톱이 얼마나 끔찍한 증상인지를 알지 못했다. 이후의 상황은 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오른발의 엄지발가락은 점점 통증의 강도를 높여가기 시작했고 두 달 전부터는 지금처럼 잠깐 걷기만 해도 통증 때문에 걷는 것이 고역인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엄지발가락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굳이 당시의 엄지발가락 상태를 말하면 엄지발가락 왼쪽 살은 굳어버린 피와 엄청난 고름과 염증으로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병원에 안 가려고 손을 비누로 씻은 뒤 아예 고름을 때려고 했으나 통증이 이를 못 하게 방해했다. 끝내 이 방법은 포기했다.


 더 고역인 것은 양말을 일절 못 신는다는 것이었다. 내향성 발톱일 때 양말을 신으면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고름이 끈적거려서 양말에 착 달라붙기 때문에 양말을 벗게 된다면 사실상 양말과 고름을 같이 때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양말을 못 신으니 신발을 벗어야 할 상황에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내향성 발톱 환자라는 사실을 강제적으로 알려주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사람들로부터 놀림감이 되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나는 서울시와 다시 서기라는 노숙자 센터에서 운영하는 다시 서기 진료소에 가서 최소한의 치료를 받을 생각이었다. 물론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반 병원처럼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내향성 발톱을 그냥 방치하면 아예 발가락 절단까지 가능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이상 최소한 치료약이라도 받을 생각이었다. 다시 서기 진료소는 서울역 인근에 있었다. 아무래도 서울역이 노숙자가 많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상당히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시 서기 진료소에 들어가고 직원에게 나의 이름과 나이를 적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직원 분은 내게 자리에 앉아서 대기하라고 말했다. 이후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가 내 이름이 불리자 의사가 있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에는 의사 한 명과 여러 진료기구가 있었다. 의사는 내게 어떤 질환 때문에 왔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곧바로 나는 내향성 발톱 때문에 왔다고 하며 오른발 엄지발가락을 의사에게 보여줬다.


 의사는 나의 엄지발가락을 보고는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의사는 돋보기를 통해 내 엄지발가락을 자세히 봤다. 이미 엄지발가락은 피로 가득 찬 고름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돋보기를 통한 진찰이 끝나자마자 의사는 내게 주민등록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줬고 의사가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조회한 뒤 말한 말이 충격이었다.


 바로 가족과의 단절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다시 서기 진료소에서는 치료를 못 해주겠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당장 치료약이라도 받으려고 온 것인데 의사는 앵무새처럼 가족과 내가 단절이 되었는지가 입증되지 않으면 여기서 치료를 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노숙자로 있었지만 법적으로 주민등록등본 상에서는 아버지와 같이 사는 걸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전입신고를 해야 했지만 집이 없는 노숙자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이때 내향성 발톱으로 인한 통증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에서 이런 청천벽력의 소리에 너무 화가 나서 의사에게 욕은 안 했지만 ‘지금 치료가 필요한 사람에게 가족과의 단절만 생각하는 이 상황이 말이 되냐?’고 말하며 항의했지만 의사도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10분 정도 의사에게 항의를 한 끝에 나는 절뚝거리는 발걸음을 걸으며 다시 서기 진료소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분노가 하루종일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노숙자 대상 치료소마저도 가족과의 단절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보며 사회가 얼마나 돈에 지배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사회의 부조리를 깨달을 수 있었던 순간 중 하나였다. 처음 사회의 부조리를 깨달은 순간은 다름 아닌 내가 아버지에게 아동 학대를 당했을 때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은 순간이었다. 심지어 국가와 사회도 내가 아동 학대 피해자라는 것을 아예 몰랐다. 결국 길을 걷는 도중 다시 한번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이런 나의 비참한 현실에 눈물부터 흘렀다.


 이후 나는 내향성 발톱 치료를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도서관에 있는 컴퓨터로 검색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다시 한번 사회의 부조리를 비참하게 깨달을 수 밖에는 없었다. 나는 ‘노숙자 의료급여’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받기 위한 조건을 읽고 나자 내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숙자 의료급여를 받기 위한 조건은 전체 노숙자 중 1% 미만만 해당 조건에 충족시키는 것에 불과할 거라고 확신할 정도로 지나치게 까다로웠다. 일단 노숙인 센터에서 3개월 이상 지냈다는 게 입증되어야 하고 건강보험료를 6개월 이상 체납한 이력과 최저생계비 이하까지 총 세 가지나 되는 조건을 달성해야 했다. 그나마 최저생계비라면 몰라도 나머지 두 조건은 일반적인 노숙자가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의뢰서를 소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병원에 들어가면 본인부담금이라는 빚이 생기게 되는데 그럼 노숙자 의료급여를 받는 상태였음에도 앞서 말한 빚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하는 게 현실이었다.  실제 PD수첩의 ‘38세 노숙자 홍 씨의 죽음’ 편을 본다면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 수가 있다. 


 결국 나는 내향성 발톱에 대한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한 상태로 자연적으로 치유될 때까지 무려 6개월 동안을 버텨야 했다. 그때까지는 양말도 못 신고 열 걸음만 걸어도 통증이 극심해져서 자리에 주저앉은 것은 덤이다. 진심으로 노숙자를 위해서 만들어진 치료소조차 가족과의 단절만 중요시한 모습을 보며 적지 않게 실망했다. 앞으로는 당시의 나처럼 치료를 받아야 하는 노숙자가 최소한의 치료도 전혀 받지 못한 채 증상이 악화되거나 사망하는 이유가 고작 ‘가족과의 단절’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청년 노숙자로서의 첫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