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인의 수학여행 -1

경주 가는 길

by 아난



*매주 토요일/ 일요일 연재









버스 터미널은 생각보다 북적이지 않았다. 선선한 가을 햇살 속 행인들의 그림자가 조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을 뿐. 해인의 갈색 눈동자가 문득 건물 기둥에 박힌 전신거울로 향했다. 어깨를 조금 넘는 긴 검은 머리, 붉은 와인색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거울 안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리를 매만져 보았지만 어쩐지 푸석한 느낌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턱 밑에 봉긋 올라와 있는 뾰루지도 어쩔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밀물과 썰물처럼 버스는 쉴 새 없이 플랫폼을 채웠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배기가스의 매캐한 냄새가 감도는 그곳에 곧 ‘웅’ 하는 엔진 소리와 함께 덩치 좋은 고속버스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해인은 ‘서울->경주’라는 문구를 재차 확인한 뒤, 버스에 올라 두리번거리며 좌석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곧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가 보였는데 생각보다 뒤쪽에 자리한 좌석이었다.


해인의 뒷편, 마지막 열 오른쪽 창가에는 한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짙은 빛깔의 청재킷을 걸치고 검은 모자를 쓴 그는 창밖으로 무심한 시선을 내던지고 있었다. 밖에서 뜨끈한 믹스커피 한 잔을 뽑아온 버스 기사는 짧게 출발을 알리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한순간 버스가 꿀렁꿀렁하면서 속도 방지턱을 넘고 기사가 한껏 돌리는 핸들만큼이나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 막 출발했을 뿐인데 왠지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이 이상한 여행의 시작이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기분이야 어떻든 버스는 이미 밀집된 도심을 벗어나 시원한 속력을 내며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창밖 너머로는 누구 것인지 모를 논밭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새카만 밤이 되면 아마도 논밭 저 너머 띄엄띄엄 떨어진 집들의 불빛이 하나둘 켜질 것이다.


여행이라기보다는 가출에 가까운 일탈.

처음엔 조금 후회하기도 했지만, 막상 고속도로 위를 하염없이 달리고 있자니 왠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느긋해졌다. 한 번쯤은 이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차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목적지 따위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냥 멍하니 창밖만 응시하고 싶었던 그런 때가. 그래, 이건 어쩌면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을지도 몰라.


그 아이는 조금 이상한 아이였다. 일단 대단히 시끄러웠다. 재잘재잘재잘. 뭐가 그리 재밌는지 쉬지도 않고 잘도 떠들어댔다. 그 애는 해인의 아빠가 자기 친아빠라도 되는 양 어린아이처럼 껴안고 아빠의 팔에 매달렸다. 정말 놀라운 친화력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어린아이인가 싶기도 했다. 지금껏 딸이라곤 무뚝뚝한 해인의 모습밖에 보지 못했던 아빠도 처음엔 당황하는가 싶더니, 곧 새로 생긴 막내딸을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잘 웃지 않던 아빠가 간혹 그 아이를 보고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것을 보고 해인은 진심으로 놀랐다. 아빠한테 저런 얼굴이 있었나? 아빠가 행복한 건 좋았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동생, 그 아이의 이름은 동아였다.


그 애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하는 호칭이 무엇인지 검색해보았다. 처음엔 ‘이복동생’인 줄 알았는데 ‘이복’은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제자매, ‘이부’는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자매라고 했다. 엄마도 아빠도 다른 형제자매에 붙는 호칭은 ‘의붓’이다. 그 ‘의붓’ 동생이 생겨버렸다. 낯선 새엄마와 함께.


그 아이는 애초에 눈치라는 것을 탑재하지 않고 태어난 듯했다. 늘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음악이 없어도 몸은 언제나 리듬을 타고 있었다. 꿈이 아이돌 가수라고 했던가? 밤이 되면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유튜브 음악을 틀어놓고 댄스 실력을 뽐냈다. 최근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애니메이션 주제곡에 맞춰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아이라도 된 듯 춤을 춰댔다. 아빠와 새엄마는 기꺼이 관객이 되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어째서 다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단란한 가족 사이에서 해인은 혼자 겉도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 밖에서 길을 걸어가다가 동아를 만나도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 그 애가 ‘언니!’ 하고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친구들이 ‘아는 애야?’ 하고 물어도 당당히 모른다고 답했다. 집에 있을 땐, 단 한 번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일단 집에 가면 방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으니 자연히 대화의 통로가 차단되었다. 모두 소극적인 방법이었지만, 본인의 냉랭한 태도가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길 바랐다.


해인은 애초부터 아빠의 재혼을 반대했다. 둘이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아빠는 간곡한 어조로 해인을 설득했다. 돌이켜보면 조금 치사한 방법이었다.


-아빠 정도 나이가 되면 사랑보다 믿음이 더 중요해. 난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 내가 건강하고 돈도 잘 벌어야 해인이 계속 노래도 부르고 좋은 대학도 가지. 이번 한 번만 아빠 믿고 따라주렴.


아빠의 말대로 해인은 돈 먹는 하마였다. 소프라노를 꿈꾸는 예술고등학교의 성악부원. 음악 레슨은 상상 이상으로 비쌌다. 아니, 수도권에 있는 예술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지방에 살던 가족이 애초에 서울로 이사했던 것도 바로 해인 때문이었다. 건설업을 하던 아빠의 사업이 기울어진 후, 계속 예고를 다녀도 되는지, 성악을 전공해도 되는지 의문이었지만, 아빠는 단 한 번도 그만두라는 말을 하거나 자신 없다는 내색을 비추지않았다. 아빠는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했는데, 그가 원하는 단 하나를 반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 이 버스를 타고 있을 일은 없었을지도. 운명은 그렇게 꾹꾹 눌러오던 뜨거운 불만을 기어이 터트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느 화창한 봄날, 아빠의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딱 3개월만 같은 방을 써라. 그 뒤엔…….

-싫어요. 내 방에 왜 쟤를 들여요?

-3개월이라고 했잖아.

-싫어요. 혼자 쓰기도 좁은 방이에요.


새엄마가 잔뜩 미안한 얼굴을 하고 아빠 뒤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비겁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한때 의상 디자이너였던 새엄마는 그녀만의 작은 의상실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간 다른 일을 하며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접고 있었지만 재혼과 함께 그녀의 꿈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소수를 대상으로 한 맞춤 의상과 소품들을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서 팔 계획이라 했다. 문제는 원하는 위치와 가격을 가진 작업실에 3개월 뒤에나 입주할 수 있다는 것, 이 상황에서 개업 소식을 알게 된 지인들이 벌써 주문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만 했다. 새엄마가 그 일을 위해 들여오는 온갖 짐의 사이즈도 만만치 않았다.


-여보, 그만해요. 싫다잖아요. 해인이한테 이건 예의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거실에서…….

-아니야, 딱 3개월이잖아. 3개월만 같은 방 쓰면서 언니, 동생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게 뭐가 나빠.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해결할 테니.


아빠에게 해인은 설득과 협상의 대상이 아닌 해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이제 다정한 아빠가 아닌 집안의 가장로서 해인 앞에 섰고, 더는 묻지 않았다. 아빠는 평소 같지 않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문을 열고 동생이 짐을 나르는 걸 도우라고. 해인은 입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어느새 눈가가 눈물로 흐려지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그 애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눈치를 보고 상처받길 원했다. 하지만 이 집에서 가장 울분에 차 있는 건 본인이었다. 그 눈치 없는 아이도 얼음장 같던 언니의 볼에 눈물이 타고 흐르자 조금 난처해하는 것 같았다. 동아는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본인의 짐을 해인의 방 안에 들여다 놓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존재가 그렇게 벌레처럼 싫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날 밤 해인은 불이 꺼진 방에서 처음으로 의붓동생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애가 숨 쉬는 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제가 미움을 단단히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 그 아이도 최대한 움직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도저히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그때 그 눈치 없는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아직도 화났어?

…….

-나 내일 수학여행 간다?

…….

-어디로 가는 줄 알아?


해인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죽은 듯 누워 있었지만, 동아는 아예 그녀 쪽으로 돌아누워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경주로 간대. 언니도 중학교 때 경주로 수학여행 갔어? 가면 돈 얼마나 필요해? 용돈 얼마 달라고 할까? 선물 같은 거 사 올까? 나 댄스 경연도 나간다? 선생님이 내가…….

-시끄러.


꾹 참고 있던 해인의 한마디가 나왔다. 짧지만 매서운 목소리였다. 저쪽에서도 소리가 뚝 그쳤다. 눈치도 염치도 없는 아이. 저런 아이와 한집에 살고, 저런 아이와 자매라니. 이젠 분노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3분 정도의 침묵이 흘렀을까? 그 애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살짝 떨리는 소리였다.


-언니는…… 나 싫은 거지?

-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명료한 답. 거기서 멈췄더라면 좋았을 것을.


-네가 싫어.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해인은 창밖으로 흩어지는 풍광을 보며 생각했다. 억울하다고. 아버지의 재혼, 새엄마, 의붓 자매……. 신데렐라가 된 것은 본인인데, 신데렐라의 나쁜 언니까지 되었다는 것이 억울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눈에 절로 눈물이 맺혔다. 이런 여행의 한 가지 좋은 점은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멜랑콜리에 젖어 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왜 그래?’, ‘기분 풀어.’ 따위의 전혀 도움되지 않는 귀찮은 위로를 받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때였다.


“벌써 늦가을 기운이 도는구나. 학생은 어디로 가나?”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였다.

“학생.”


부름이 다시 귓전을 울렸을 때 해인은 고개를 돌렸다. 꿈이 아니었다. 옆 구간 좌석에 앉은 한 노파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인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눈가에 맺힌 눈물 자국을 닦아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말을 이어갔다.


“가는 길도 멀고 한데 말동무나 좀 하자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잠도 잘 안 오네.”

느닷없는 요청이 당황스러웠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학생은 경주 사람인가?”

“아뇨.”

“그럼 경주엔 무슨 일로?”

“그냥…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마디를 툭 내뱉은 해인은 자신의 대답이 조금 성의 없다고 느껴졌던지, 다시 짧게 덧붙였다.

“사람 좀… 찾으려구요.”

“사람? 누구를?”

자칫하면 대화가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은 그저 별일 아니라고 대충 둘러댔다. 솔직하게 이야기해 봤자, 자칫 불필요한 의심만 살 뿐이다.

“경주행은 처음인가?”

“경주가 처음인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중학교 때도 경주로 수학여행 갔어요.”

“그럼 이번이 두 번째인가, 경주엔?”

“아뇨, 예전에 가족 여행 한 번 갔어요.”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기 전…… 진짜 가족이랑.

“그럼, 이번이 세 번째구먼. 갈 데도 많고 볼 것도 많은 경주지만, 이번에 가면 감로수를 꼭 한번 마셔보게나.”

“감로수요?”

“밤이 되면 샘에 달이 뜨는데 그 물을 마시면 눈이 아주 밝아진다네. 원기를 다시 회복할 수도 있고.”


할머니들은 별것 아닌 것도 영약처럼 말하곤 했다. 물 한 바가지 떠 마시고 눈이 밝아지고 몸이 회복된다면 세상에 아픈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린아이들한테나 해줄 법한 진부한 옛날이야기.


그때 버스 안 TV 모니터에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왔다. 전원은 켜졌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모니터가 켜지자 두 사람 사이의 대화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온갖 시끄러운 정치 관련 뉴스가 끝날 무렵, ‘석굴암 본존불 균열’이라는 자막이 뜨더니 석굴암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송출되었다. 최근 있었던 태풍으로 인해 석굴암에 큰 피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전에도 이미 문화재 보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내용이 자막으로 뜨고 있었다.


전문가들이 본존불 대좌의 금이 간 틈새를 가리키며 뭐라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해인은 실로 오랜만에 석굴암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세상이 요동치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갈 때 석굴암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석굴암도 이젠 어쩔 수 없다는 듯 시간이라는 도끼로 깨어지고 있는 것일까. 뉴스를 보던 해인은 문득 시선을 돌려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용한 시선으로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해인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을 보니 다행히 적적함은 사라진 모양이었다.


도착을 한 시간 정도 앞두고 있었을 무렵, 어느샌가 크고 작은 빗방울들이 창밖을 때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해인은 좌석의 주머니에 넣어둔 자신의 작은 접이식 우산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그때였다.


“어이쿠야… 비구나.”

노파의 목소리에 염려스러움이 엿보였다.

“우산 안 가져오셨어요?”

“준비 못 했지.”

“버스에서 내리시면 택시 타실 건가요?”

노파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해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 꺼 쓰실래요?”

“학생은?”

“전 하나 더 사면 돼요.”


간혹 몇천 원짜리 양말 한 켤레도 사기 어려운 어르신들을 본 적 있었다. 마을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 중에 그런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노파의 옷이 낡은 점, 그리고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은 것으로 보아 넉넉한 형편으로 보이진 않았다. 해인 역시 여행 자금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할머니보다는 더 나을 것이었다.


노파는 해인이 건넨 우산을 조심스레 받아들더니 옆에 꽁꽁 묶여 있던 낡은 검은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해인은 그녀가 갑자기 뭘 하나 싶어 그저 숨죽이고 바라볼 뿐이었다. 노파는 보자기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뭔가를 꺼내 주름진 손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거기엔 한 손에 들어갈 법한 작은 잔이 놓여 있었다. 뚜껑이 있는 하얀 잔이였는데, 아주 둥근 모양의 잔이었다.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연상시키는 그런 모양이랄까.


“받으시게.”

“네? 저요? 저 주신다구요? 왜…….”

“늙은이 말동무도 해주고 이리 마음까지 써주었으니 나도 뭐라도 해야겠지.”

“아니, 저는…….”


알 수 없는 잔을 바라보는 해인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맴돌았다. 하지만 노파는 한번 꺼내놓은 잔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머뭇거리자니 어르신의 성의를 거절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잔을 조심스레 받아 든 해인은 그것을 교복 주머니에 넣고 좌석에 다시 몸을 기대앉았다. 노파는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창밖의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해인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 감기기 시작했다. 버스는 경주를 향해 마지막 박차를 가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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