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림 그리는 일을 서서히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자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여럿있다. 첫째는 나의 집중력과 주의력이 전에 비해 많이 분산되었다는 것. 둘째는 영감과 생각을 떠올리고 창작하는 과정이 뭔가 인공적으로 변한 것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각이 깊지도 독창적이지도 못하고 늘 상당히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는 느낌이랄까. 셋째는 시간을 들여 무엇인가를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에 있어서 인내심이 상당히 부족해지기도 했다. 클릭 한번 하면, 그림도 그려주고 광속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챗GPT가 있는 세상에서 천천히 한획 한획 그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바보스럽고 참으로 무익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증상의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는데, 그것은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었을때, 사고의 과정과 존재의 과정이 인공적으로 압축되어 변화하는 증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악명 높아서 한번 클릭하면 쉬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우습게 시시한 쇼츠를 보며 날려버릴 수도 있다. 문제는 시간낭비에서 이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깊게 사고하는 능력을 파편화시킨다는 것이 큰 문제이리라. 과거에는 유튜브 페이지에 수둑하게 떠 있는 저 동영상들에 뭔가 유익한 정보가 많이 있을 거란 생각에 보고자 하는 욕심이 크게 일었는데, 그것이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주의력이 상당히 분산되기에, 이제는 차라리 안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또한 눈길을 끄는 컨텐츠는 대부분 자극이 강한 컨텐츠이다보니, 그 맛에 길들여져서 평범한 일상에서도 계속 자극과 흥분을 갈구하는 상태가 되는 것도 있다.
과거 언젠가 한 중견 탤런트가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드라마는 물론 아예 TV를 못보게 하는 식으로 아이들 교육을 한다고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분은 드라마에 약방에 감초처럼 자주 등장하는 배우였는데, 본인은 컨텐츠를 수두룩하게 만들면서 경제활동까지 하는데, 정작 자신의 자녀들은 미디어에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보고는 약간 쓴 웃음이 난 적이 있다. 사실 자식 생각하는 부모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법도 하지만, 뭔가 약간 앞 뒤가 안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씁쓸했던 것이다. 어쨌든 애나 어른이나 미디어 컨텐츠에 과도하게 노출되어서 좋은 것이 하등 없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이런 점을 문제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최근 우리가 디지털 세상을 맞닥뜨린 이후로 겪게 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들여다본 책을 한 권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내 생활 습관과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많은 시간을 우리의 직접 경험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경험을 소비하는데 쓴다.
... 우리가 이런 동영상(리액션 영상)을 좋아하는 것은 그 영상들이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주기 때문이다. 진짜 경험을 짧은 시간에 엿보는 것 말이다. 한 평론가는 "리액션 영상을 보는 것은 직접 경험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리액션 영상은 경험 표절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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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1930년대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경험의 빈곤'이 사람들을 낯선 유형의 절망으로 몰아넣고 "모든 것이 가장 단순하고 편안한 방법으로 해결되는" 존재 방식에서 안도감을 찾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경험의 종말], 크리스틴 로젠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책상의 컴퓨터 앞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27인치 모니터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때로 교류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직접 경험이라는 것의 빈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세상은 모니터 속에서만, 혹은 내 머릿 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무엇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최근 내가 좋아하던 옛날 드라마를 다시 한 번 돌려보는데, 주인공이 한 겨울날, 달이 휘영청 떠있고 쏟아질 것 같은 별무리로 수놓아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속을 삭이는 장면이 나왔다. 그 때, 문득 어린 시절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드라마로만 보는 저 운치있는 밤하늘을 언젠가 나는 정말 보았다. 시골에서 가족과 함께, 모닥불도 피우고, 이런 저런 잡다한 이야기도 나누며 달빛이 내리는 풍경 속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달빛이 그렇게 밝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어느정도 밝냐면, 바위 위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별도 많았다. 지금은 밤에 나가도 도시의 빛공해로 인해 별, 달이 희멀건하게 보이지만 내가 어린시절 보았던 그 밤하늘의 별과 달은 그토록 또랑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실체의 경험이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 경험이 너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느꼈고, 또 어린 시절의 다양하고 깊이 있는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좀 불편하고 귀찮더라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가보고, 경험하고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경험의 빈곤'으로 살아가는 밋밋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 뒤덮여 살지만 사회적 기술(예의범절, 인내, 눈 맞춤eye contact)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물리적 공간에 대한 이해와 상호작용이 부족하다.
... 우리는 매일같이 무인 키오스크에서 계산을 하고, 온라인에서 간편하게 물건을 사며, 수많은 옵션을 선택하고 대기해야 하는 자동 응답 전화라는 지옥을 견딘다.
-[경험의 종말], 크리스틴 로젠
급격한 기술 혁신으로 우리는 편의성을 얻었지만 인간이 인간과 평범하게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직접 만나는 대신 전화를 하고, 전화를 하는 대신 문자를 하고 문자를 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지면 인스타나 페북에 '좋아요'를 누른다. 언젠가부터 사회에서 '썸', '썸탄다' 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썸은 본격적인 연애가 아닌, 그 이전에 서로에 대한 호감을 살짝 살짝 내비치는 단계이다. 예전에는 이런 말이 없었다. '사귄다'라는 말은 있어도 이런 애매한 단계를 칭하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이런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단어도 생겨났고, SNS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관계를 유지시키는 '좋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점에 있어서 별로 불편함을 못느꼈는데, 나라는 사람 자체가 사람을 만나서 직접 소통하는 것을 그렇게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사람을 만나면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얼굴을 바라보고 눈을 쳐다보기도 하는데, 금새 쑥쓰럽달까, 부담스러워져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귀를 열어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왜 이렇게 아이 컨택트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상대방을 쳐다보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그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은 상대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볼 때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장기적으로는 절대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을 최근 많이 느꼈다. 직접 사람과 만나고 대면해서 이야기하고 교류하는 것이 생각보다 나에게 좋은 기운을 준다는 것을 느낀 적이 많았다. 예전에는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면 관심을 끄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고,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할 수 있다고 느껴진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풀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세상이 넓다는 것, 그리고 다양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혼자 나만의 골방에 앉아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창작을 위한 더 큰 에너지를 받기도 하는 듯 하다.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대화, 별것 아닌 것에 함께 웃는 일, 그런 시간을 통해 좁아졌던 마음이 열리기도 하고 심각했던 생각들이 편안해지는 것도 느끼게 된다. 나이가 한 살 한살 먹어갈 수록 정말 함께 잘 살아가야 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말했다. "관심은 가장 희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다. 물리적으로 구현된 존재로서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즉 같은 공기를 마시고, 말로 하지 않은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몸짓에 공감하는 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경험의 종말], 크리스틴 로젠
최근 한 책낭독 모임에 참여했다. 아는 지인분의 초청으로 우연히 방문한 책낭독 모임이었다. 각자 책을 낭독하고 이야기를 좀 하다가 그렇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책낭독 멤버 한분이 근사한 저녁상을 차리셔서 함께 먹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갔던 그 낯선 자리에서, 함께 책도 읽고, 함께 밥도 먹는 일이 일어났다. 예상치 못했던 그런 상황 속에서 사람을 직접 만나고 교류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느껴보았다. 세상에는 기쁘고 의미있는 만남만 있은 것은 물론 아니다. 아픔과 교훈을 주는 만남도 분명 있는 법이지만, 대게는 이렇게 무해하고 정다운 만남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한발 나아가서 세상과 만나고, 실체 없는 삶이 아닌 땅에 발을 단단하게 딛은 실체가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헛된 욕심을 내려놓고, 작은 경험과 만남들에 감사하다보면 내 삶도 조금씩 조금씩 실체로 채워질 것 같다. 그렇게 달콤하고 단단하게 여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