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덥다.
이 더운날 기어이 움직이기로 한 것은 최근 동네 밖으로의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밖에 나간다고 뭐 대단히 볼게 있겠어' 라는 늙은 마음으로 우물 안 같은 동네에서만 반복되는 일상을 이어오다가, 그 단조로움에 질려 결국 엊그제 뛰쳐나가게 되었다. 행선지를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을 정성도, 시간도 없어서, 전에 봐두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현재 여러 전시가 진행 중인데, 하나는 '마나 모아나'라는 전시로 태평양에 수많은 섬에서 인간이 창조한 예술과 문화, 즉 오세아니아의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이다. 포스터가 화려하고 예뻐보였다. 뭔가 '마나 모아나'라고 하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와 하와이 생각나면서 여름 분위기가 느껴지고, 호기심에 이것을 봐야 겠다라는 마음으로 옮긴 걸음이었다.
막상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하니, '새나라 새미술'이라는 조선 시대 미술품에 관한 전시가 하나 더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는 BTS의 RM군이 다녀간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전시이다. 오랜만에 나왔겠다. 또 언제 다시 나올까 싶어서 두 전시의 티켓을 모두 끊었다.
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훨씬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은 '새나라 새미술'이라는 전시였다. '마나 모아나'는 전시 포스터는 예쁘긴 했으나, 태평양 섬들의 고대 문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에게는 좀 낯설게 다가왔다. '마나 모아나' 전시에서 '아, 이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이리 살았구나' 정도를 느꼈다면 '새나라 새미술'에서는 이미 한국의 문화적 컨텍스트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편안하게 그리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집 천장의 몇배보다 높고 탁 트인 천장을 가진 국립중앙박물관을 거닐며, 예술품을 관람하는 것이 주는 영감(inspiration)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최근 그림 한 장을 그리고 있는데, 내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도 그냥 어디서 본 듯한 흔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기뻐하는 작품이라기보다 남한테 보여주기 위해 꾸역꾸역 그리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열심히 덧칠을 하는 중이었다. 스스로 봐도 뭔가 답답하고 한심한 느낌이 들던 중, 이 전시를 통해 나한테 빠져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알고 그리는 것과
모르고 그냥 그리는 그림의 차이.
내가 그리려고 하는 것의 본질을 알고 그리는 것,
그저 다른 사람의 눈에 괜찮아 보일 수 있도록 그리는 그림의 차이
고요하고 고매하며,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깃든 그림과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어서 빨리 완결되기를 초조하게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그런 그림의 차이
몇 획 긋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그림과
수백번의 붓질이 오갔는데도 텅 비어있는 그림의 차이랄까.
그림에도 격이 있구나. 급을 나누는 격이 있구나.
전시를 보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에 젖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 급을 나누는지 생각해보았는데, 그것은 역시 그리는 자의 내면의 무게감이라고 생각했다. 진실함, 고요함, 밝은 양심으로 무게를 갖춘 자의 그림은 역시 다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오랜 역사 속의 그림에서 그런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나는 이것이 당시 인물들이 좀더 고요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그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휴대폰, TV, 인터넷이 없는 세상. 말도 못할 정도로 불편하긴 했겠지만, 나의 정신 속을 함부로 침투하고 휘젓고 정량화 시키는 외부 자극과 잣대가 그만큼 적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 오늘날 도시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우리들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정신을 바로 차리지 않으면 금새 정보의 소용돌이로 휩쓸리고 만다. 진정 유혹이 많은 세상. 내 정신의 흐리멍덩함도 바로 그런 유혹에 이기지 못해서 생긴 결과라고 보았다.
이번 전시회는 큰 전시답게 책에서만 보았던 유명한 유물들도 제법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미술 문외한은 (사실 전공자라해도 미술 작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작품들을 보아도, 제대로 된 설명을 읽지 않는다면 이 예술품이 가진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선택해서 진열해놓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놓은 이런 전시회를 통해, 우리는 한발 짝이라도 그 아름다움에 다가가서 감상하고 음미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감사한 일이다.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은 마트에서 생선 고르는 눈으로 본다면 제대로 보기 힘들다. 좋은 예술 작품일수록 섬세한 시선으로 관찰될 수 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그러한 것 같다. 무딘 정신과 눈으로는 포착하기가 어렵다. 나비의 날개처럼 가볍고 곤충의 촉수처럼 예민한 레이더망으로 감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들은 다른 세계, 다른 파장에서 꽃피어나기에 그러하다. 눅눅한 현실과 다른 결에 있는 것이 고매한 예술품의 특징이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밥을 주지도 않고 떡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 그대로 존재함으로서 우리를 그것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조금 더 고요하고 고매한 세계로. 진정한 꿈의 세계로.
우리로 하여금 조금 더 고상한 꿈을 꾸게 만드는 좋은 작품들의 특징은 그 안에는 항상 소리와 형태가 없는 '질서'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설령 어지러워 보일지언정 그 안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다. 이렇듯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은 항상 내게 조화와 질서를 느끼게 한다.
나의 어설픈 그림 안에도 이러한 투명한 정신과 아름다운 질서가 머물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