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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해지고 싶다.

by 아난
2023. 11. 10. - 0 (4).jpg 탁상시계를 든 손을 그린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 스케치북에 펜



난 세상의 변화의 물결에 재빨리 올라타는 사람은 아니다. 물론 늘 이런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창시절을 너머 20, 30대까진 호기심에 새로운 곳도 기웃거려보고 새로운 문물이 나오면 관심을 갖기도 했는데 (물론 이것도 남들에 비하면 그닥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일에 관심이 식어가는 것 같다. 내가 이제껏 걸어온 길, 이제까지의 방식을 벗어나 또 다른 길을 개척하기도 쉽지 않아보이고, 무엇보다 나의 현방식이 내겐 가장 정상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보여서 그런 것일테다. 그래서 가끔 인생의 2막이 시작될 무렵,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분들을 보면 감탄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삶이 나를 나도 모르게 시들어 가게 만들고 있는건 아닐까 의심도 해본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나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한국은 해외에 비해서 문화적 응집력이랄까, 어떤 일률적인 면이 강한 나라다. 그래서 친근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정상의 범주라고 강력하게 선을 그어놓는 무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서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때론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있는 느낌도 든다. 정치, 사회적인 변화가 진행되며 과거에 비해 지켜야 할 암묵적인 룰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 룰을 조금만 벗어나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하지만 단순히 이것을 좋다 나쁘다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되어서 답답한 면도 있지만 과거의 악습이나 편견을 자체 정화하려는 공동체적인 노력도 그 안에 함께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이 되가면서 세상 모든 일이 흑백으로 딱 나눠서 옳고 그름을 가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 내 마음 속에 자주 떠오르는 생각은 '내가 안해보던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새로운 시도인가?' 와 같은 물음들이다. 그렇게 '내가 해보고 싶은 짓이 뭘까?' 라는 생각까지 닿으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답은 ‘발칙하게 살아보는 것' 이다. 난 평생을 어른들과 선생님 말을 잘듣는 아이로 살아왔다. (모범생이거나 우등생이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말만 잘 들었다. 물론 방황의 시기도 있었지만 말이다.)


남의 말을 거스르거나 내 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그런 삶은 아니었다. 내가 착해서라기보다는 일단 나는 그렇게 저항하고 주장하는 삶이 무지 피곤해보였다. 원체 남과 싸우거나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고 불편해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럭저럭 평화롭게 산 거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살았다는 느낌은 적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리 살게 될것 같긴 한데,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그리는 그림에서만큼은 좀더 새로운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지난 날 진지하고, 성스러운 주제를 가진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이제는 그런 진지함과 종교적 느낌을 내려놓고 좀 더 제멋대로인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그러니까 애써 어른처럼 참고 질서정연해보이는 그림이 아니라, 사춘기 소녀처럼 발랄해지고 제멋대로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이다. 좀 유치해도 상관없고 남들 눈에 좀 못나 보여도 상관없다. 다만 내 자신에게 솔직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어렸을때 나는 그림 앞에서 솔직했던 것 같다. 애써 뭘 보여주려고 하기보다, 심각하지 않게 슥슥 그리고 멋대로 재미나게 그렸던 기억이 아직도 희미하게 내 가슴을 맴돈다. 가끔 순수했던 그 아이가 기억난다. 지금의 나와 그 아이는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달라져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동심의 한조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고, 그런 인물을 우연히 마주할 때 참으로 아름다워보인다. 어렸을 때 그렸던 그림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도록 스스로에게 허용했던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이것으로 다른 누군가를 설득해보겠다라는 어젠다가 없는 순수한 표현들.


생각의 도약의 저자 도야마 시게히코는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두가지 카테고리에 넣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바로 수렴적 사고와 확산적 사고다.


확산 작용으로 생겨난 것은 산발적이다. 선처럼 뭉쳐 있지 않고 점처럼 흩어져 있어 언뜻 보면 점과 점은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이미 사용한 비유를 쓴다면 비행기형 사고다.

이와 대조적인 것이 수렴에 의한 정리다. 우선 정리에는 초점이 필요하다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통합하고, 그 방향이 명확하지 않으면 정리를 할 수 없다.

-[생각의 도약], 도야마 시게히코


다른 말로 표현을 하자면 수렴적 사고는 정리하고 분류하고 요약하는 방식의 사고이고, 확산적 사고는 그와 반대로 자유롭게 상상하고 팽창하는 방식의 사고이다. 우리는 살면서 학교 시험이나 여러가지 평가 기준에 적합한 점수를 받기 위해 수렴적 사고에 집중했고, 그런 사고에 능한 사람이 좋은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컴퓨터를 넘어 인공지능이 나오는 시대에 수렴적 사고만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넘어가기 어려워졌다. 수렴적 사고는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수 있는 사고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들, 일관성 없는 '점'들을 빅뱅처럼 폭발시켜서 만드는 확산적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의 그림에서 우리는 그러한 확산적 사고의 흔적들을 본다. 애써 통일 시키지 않은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하고, 그림 안에서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둥둥 떠다니는 캐릭터들이 그러하다.


좀더 넓게 상상하고,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일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하지만 현실에서 내 인생을 걸고 그런 도전을 갑자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확산적 사고, 새로운 도전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어도, 난 현실적이고 겁도 많은 어른이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내가 그리는 작품을 통해라도 작고 이상한 시도들을 해보고 싶다.


그간 그렸던 그림과는 좀 다른 분위기의 무언가를 그려보고 싶다. 네모 반듯한 것들을 무시하고 마음가는 대로 한다는 것이 내게는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슬슬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거대한 정신적, 물리적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오래된 관념에 젖어 살던 나라는 사람이 내 나름의 변화와 혁신을 시도할수 있는 놀이터가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얼마나 다행이며 행운에 가까운 일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다른 방편을 또 찾았겠지만, 그래도 그림작업이라는 베스트 프렌드가 곁에 있어주어서 다행이다.


내 작은 소망이 있다면 그림과 같은 절친을 몇개 더 만드는 것이다. 현대는 n 잡러의 시대라고도 하고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라고도 한다. 한 사람이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다양한 역할에 종사한다. 지금껏 미술작가이자 강사로 살아온 내가 또 무엇이 될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종종 생각해보게 된다. 딱히 다른 것을 배워보거나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솔직히 쉽사리 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중이 제 머리 못깍는다고 의외로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해보지 않는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그것은 색다른 취미를 갖는 것부터 시작될까, 아니면 우연한 인연에 의해 시작될까. 정답은 없지만 문은 열어놓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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