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간이 날때 틈틈히 읽고 있는 책 한권이 있다. 도야마 시게히코라는 일본 저자가 쓴 [생각의 도약]이라는 책이다.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서 광고를 보고 산 책인데, 내용이 생각보다 기대 이상이었다. 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방법으로 창의적 사고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을 담은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감탄했고 저자의 일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을 느꼈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감탄하고 정말 필요한 힌트를 얻는 경우는 사실 내게 있어서 흔한 일은 아닌데, 이 책은 마음 먹고 산 책도 아니고 우연히 고른 책 치고는 히트했다고 본다.
여러가지 재미있는 의견이 많은데 기억에 남는 것을 몇개 적어보자면 첫째로 생각을 재우고, 발효시키는 말이었다. 저자는 '지켜보는 냄비는 끓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풀어야 되는 문제가 생기면 바로 답을 내려는 성급함을 버리고 그것을 한동안 마음 속에 재워두라고 일러둔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것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잠들어 있던 주제는 눈을 뜨면 엄청난 활동을 한다. 무슨 일이든 무턱대고 서둘러서는 안된다. 인간에게는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게 있다.
자연 속에서, 의식을 초월한 곳에서 쉬게 해줘야 한다.
-[생각의 도약], 도야마 시게히코
이러한 통찰이 나에게도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한동안 잊어버렸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매우 뜻밖에 찾아오는 일을 종종 경험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치부했을 뿐, 이것이 인간의 정신이 움직이는 방법이라는 또렷한 확신까지는 없었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희미하게 느꼈던 직감에 대한 확신을 얻은 느낌이었다. 또한 모든 일을 그저 속전속결로 해결을 봐야 할 것 같은 조급함에 대해서 다시금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충분히 생각을 재울 수 있다면 어떻게든, 내가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방법으로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겼다.
두번째로 기억에 남는 저자의 제안은 '한 우물을 파지 말라' 라는 것이다. 물론 인생 전반에 대한 조언이라기보다는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이다. 예를 들면 그는 논문을 쓸때, 한 가지 주제로 시작하지 말고, 적어도 두개 내지는 세개의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그가 말하는 '생각의 양조법'을 직접 옮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주제가 하나인 논문은 지켜보는 냄비와 같다. 그 주제로 잘 써지지 않으면 다음이 없다. 그래서 집착하게 되고 이상한 곳에 힘을 주게 된다. 머리가 휙휙 잘 돌아가지 않는다. 만일 이 주제가 별로여도 대안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주제끼리 경쟁시키고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은 주제를 정하면 된다.
... 자신만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자만이다. 뛰어난 것은 얼마든지 있다. 작은 독창성에만 매달려 이를 우주로 착각하고 선인들의 업적을 무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생각의 도약], 도야마 시게히코
이 역시 저자가 나의 약점에 대해서 제대로 지적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그림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딱 이러했다. 한 작품을 시작하면 그것이 끝날 때까지 다른 작품을 전혀 들어가지 못하고 한달, 길면 석달까지 하나의 그림만 붙잡고 앉아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과 노력이 투척이 된 그림들이 어마어마하게 만족스럽게 나왔다면 고생한 보람이라도 있었을 텐데, 필요 이상으로 제작기간이 늘어난 작품들은 이상한 잡탕밥 같이 흐리멍텅하게 끝날때가 많았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에 생생했던 영감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다른 엉뚱한 아이디어가 비집고 들어오면서 작품이 방향이 완전 딴 길로 새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한 작업을 오래 붙들고 있지 않고, 제작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으면 다른 그림을 동시에 그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중고등학생때 이미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던가. 학교에서 한 과목을 몇시간씩 들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과목의 수업을 연달아 들으면서 다양한 내용과 관점을 짧은 시간안에 가볍게 두드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짧게 짧게 다른 과목으로 넘어가는 것이 벅차게 느껴지거나 집중력이 흐려진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고 말이다.
하나만 붙잡고 늘어진다는 것. 한 때 나의 고질병 같던 이런 점은 저자가 말한대로 작업에 대한 순수한 헌신이라기보다는 이것만이 가장 옳고 가치 있다는 자만에서 나온 태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것은 자만인 동시에 집착이었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씨의 인터뷰를 언제가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분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신 적있다. '무리하게 시간을 늘려야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쉬는 날 없이 주말까지 반납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번아웃시켜야 할만큼 대단히 중요한 일은 없는 법이라 말한다. 내가 정해둔 원칙과 시간 안에서 핸들할 수 있는 것이 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니라는 것이다. 멋진 말 아닌가. 난 왜 이제야 이걸 알았을까.
이 책을 읽으며 흥미롭게 보았던 세 번째 내용은 '망각'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사회는 늘 독서, 지식의 습득, 즉 집어넣고 채우는 것은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필요없는 것을 지우고 잊는 일, 과부하 된 머리 속 지식을 정리하는 일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오로지 채워넣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굳이 독서 따위를 하지 않고 인터넷 기사만 쓱 읽어도 얻어지는 정보가 어마무시한 이런 시대에 그냥 채워넣기만 매달리는 삶은 창의적인 사고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공장(인간의 두뇌)에 물건이 잡다하게 들어 있으면 작업 능률이 떨어진다. 쓸데없는 물건은 처분하고 넓은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려서는 일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리가 주요해진다.
... 이 공장 정리에 해당하는 것이 망각이다. 망각은 인간의 머리를 창고로 볼 때 위험하다고 여겨지지만, 공장으로서 능률을 높이려면 점점 잊어버려야 한다.
-[생각의 도약], 도야마 시게히코
이게 읽다보면 정말 다 당연한 말 같고, 누구나 알 것 같은 이야기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아,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치는 나를 발견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조언이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난 책 욕심이 좀 있다. 문제는 제대로 읽지도 않으면서 책을 보면 욕심이 나고, 도서관에서 자꾸 읽지도 않을 책을 빌려온다. 그 읽지도 않을 책을 반납하느라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며 시간낭비도 꽤했다. 그렇다면, 기껏 빌리거나 구매한 책을 왜 읽지도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정보를 입력하기엔 머릿 속이 이미 다른 정보로 너무 번잡했다. 그래서 빌려온 책이 책상 한켠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숨이 먼저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머리도 복잡한 주제에 나는 애초에 왜 자꾸 책을 읽으려 했을까.
간단하다. 독서를 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을 강력하게 믿고 있고,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모두 독서를 강조해서 그저 뭔가를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이다. 딱히 내가 내면에서부터 강렬하게 탐구하고 싶은 분야가 생겨서 파고 든게 아니었다. 남들이 하는 좋은 방법이라서 나도 열심히 따라가려 한 것이다. 독서가 반드시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 이번에 내린 결론이다. 독서는 그것을 흡수할 정도로 정신이 맑고, 정말 내가 꼭 알고 싶은 것을 알기 위해 읽을 때, 그 효력이라는 것을 본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이번에 이 책을 읽고 감탄했던 것처럼 우연히 읽은 책이 큰 깨달음을 줄때도 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나의 내적 욕구와 실행의지가 일어섰을 때 독서는 힘을 발휘한다.
어쨌든 나는 당분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 않기로 했다. 일단 필요없는 지식과 정보부터 하나하나씩 지워가는 것이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첫걸음일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자유다! 더이상 머리에 뭔가를 우겨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 마음을 심플하게 만들었다. 심플해지니 무엇이 핵심인지 조금더 파악하게 되는 기분이다. 요즘에 인테리어에도 미니멀리즘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듯이, 지식의 세계에서도 그런 풍토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어차피 챗지피티가 나보다 많이 알고, 걔는 나처럼 잊어버리지도 않을테니까.
필요없는 것을 기분좋게 망각하고, 기억해야 할것은 좀더 분명하게 기억하고 싶다. 나의 본래면목,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추억,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들은 반드시 잘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소중한 것을 잘 간직하기 위해, 필요없는 것들은 이제 기분좋게 잊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