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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시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by 아난
인공지능이 그림 그리고 있는 모습을 .png





생성형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우리는 예술분야와 같이 창의적인 일에 관련된 직종들이 기술적으로 대체되기 힘들거라고 보던 때가 있었다. 당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놓였는데, 막상 본격적으로 A.I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을 때, 가장 먼저 위기에 처하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글을 쓰는 일과 같은 창작의 영역이었다. 단순히 베끼는 수준을 너머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조합해서 순식간에 그럴 듯한 한점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물론 동시에 서너점도 가능하다.) 매일 매일 생성형 인공지능의 놀라운 기능과 효율성에 대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솔직히 약간 암담함을 느끼면서 스스로에게 종종 묻게 되었다.


그림은 왜 그리는 것일까?
몇 시간이나 걸려서 그리는 한장의 그림이 인공지능이 그린 것보다 볼 품이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이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이걸 해서 뭐하나?


이런 마음 약한 질문들이 틈만 나면 내 마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림 그린다는 소용없는 노동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창작 욕구가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날 은사님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이런 속내를 내비치게 되었다. 인공지능이 훨씬 잘 그리는 시대에 어떻게 그려야 되는지 잘 감이 오지 않고 왠지 자신이 없다고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너는 똑같구나."


이것이 은사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은사님과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터라, 과거의 나의 태도가 어땠는지 기억하고 계셨기에 그 분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분 말씀인즉, '너는 과거에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너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공지능과 자신을 비교한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 태도는 똑같다. 더 유능한 대상과 자신을 끝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것.'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기도 했다. 비교대상이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았다. 인공지능의 창작물이라는 것도 결국 다른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를 적당히 조합해놓은 것과 다름없기도 하고. 자신을 믿고, 남들이 뭐라하든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그리지 못했다. 또한 몇 초안에 완성물을 뽑아내는 인공지능에 비해 너무 효율성이 떨어지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결국 '효율성'을 기준으로 세웠을 뿐, 아티스트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주는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주 작은 그림 한장이라도 그려본 사람은 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마법적인 순간을 불러오는지. 특히 '어떻게 할까?' 하고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데 한 순간 아이디어가 열려서 도화지 안에서 새로운 길이 보이는 순간에 그림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목격한 사람이라면. 망했다 싶었던 그림이 다시 재생하는 그런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인공지능은 더할 나위없이 편하고, 유능하고 효율성의 끝판왕이지만, 그런 경험을 내 대신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공지능의 시대가 아티스트를 좀더 고민하게 만들거라는 것은 확실하다. 더이상 아름답기만 한 그림이 아닌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우리 모두 더욱 노력하게 될 것이라는 것. 예전에는 테크닉적으로 매끄럽고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나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라는 것에 마음을 좀더 두게 된다.






과거에는 이승철이나 이재훈과 같은 가수, 조금 시간이 흘러서는 성시경과 같은 가수들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이 가수들이 노래를 정말 편안하게 부른다는 것이다. 뭐랄까 고음을 올리고 소름 끼치는 가창력을 발휘하기 위해 목청 터져라 애를 쓰기 보다는 편안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이게 정말 귀를 살살 녹이는 목소리다. 나는 이런 가수들을 동경하고, 저런 아티스트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생각했다.


가장 나다운 목소리로, 가장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아티스트.

그 목소리에서 커피향이던, 후르츠 칵테일이든, 자신만의 향이 강하게 나는 아티스트.

나만의 히트곡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


그들의 히트곡들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 곡들이 많다. 만약 그 가수들이 왠 종일 그 한곡만 부르고 있어도 그냥 들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것을 볼 때면 뭔가를 번잡하게 많이 하는 것, 뭔가 엄청나게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은 정말 나랑 맞는 것, 나를 대변해줄 수 있는 히트곡을 제대로 찾는 것이다. (이것을 가수가 아닌 화가로 대입을 해보자면 작품의 컨셉일 것이다.) 이게 제대로만 되면, 그래서 그것에 집중이 가능하다면 다른 여타의 것으로 번거워질 필요가 없다. (물론 관객의 눈에 쉬워보이는 노래, 그 히트곡 하나도 그 뒤에 숨어 있는 땀과 눈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가수 본인의 체력관리, 좋은 곡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


인공지능의 시대일 수록 아티스트는 이렇듯 자신만의 향기를 발굴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자연스럽게 내 안에 이미 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시대에 와 있다. 강렬한 외부자극이 너무 많다.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어도 너무나 많은 멋진 것들에 홀려서 나의 본래면목에 대해서 까마득히 잊고 마는 그런 시대이다. 게다가 KPOP의 종주국인 한국이니 얼마나 소란스럽고 화려한 것들이 많겠는가. 그렇게 멋지고 화려하지 못해서, 그렇게 잘난 그림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내 자신이 답답하고 창작 자체가 싫어진 적이 많지만, 이렇게 변덕스러운 나라는 녀석을 늘 너른 품으로 안아주고 받아준 것이 바로 빈 캔버스로, 텅빈 하얀 도화지였다. 그렇기에 난 그렇게 투정하고 발악했음에도 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로 하여금 온전히 내가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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