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휴대폰 도난 사건의 전말
휴대폰 도난 사건의 전말
1. (평지에서) 자전거 타면서 유적지 둘러 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아누라다푸라에서 (모두가 만류하는) 자전거를 렌트함
2. 유적과 유적 사이에는 나무 그늘이 없으므로 (그러니 보존됐겠지, 건조하고 뜨겁고) 당연히 힘들어 카메라 꺼내기 귀찮아 숙제하듯 휴대폰으로 냅다 사진을 찍어댐.
3. 민탈레 일몰이 좋다기에 서둘러 호텔로 돌아가는데 (하필 묵고 있는 호텔이 살짝 외곽이라) 방향치인 나는 호텔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구글맵을 보며 느적느적 페달을 밟고 있었음
4. 뒤에서 슬금슬금 오토바이를 탄 날강도 둘이 다가와 손에 든 휴대폰을 강취, 잽싸게 달아나 버림 (휴대폰에 스트랩이 있었으므로 내 손에서 비틀어 빼냈다는 게 맞는 표현)
5. 소리 지르며 따라갔지만 오토바이를 따라잡긴 무리. 심지어 한적한 길이라 목격자조차 없었음.
6. 따라가다 지쳐 길에 보이는 아무에게나 도움을 요청. 나는 여행자이며 구글맵이 없으면 호텔도 못 찾아갈 판이라 하소연. 동네 사람들 총출동. 그들이 경찰에 신고해주고 호텔 주인을 불러줌. 호텔 사장이 자전거는 나중에 찾아 오면 되니 일단 툭툭 타고 호텔로 돌아오라고 함.
7. 호텔로 돌아가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데, 경찰에 신고해준 소녀에게 연락이 옴. 아누라다푸라 최고의 천재 소녀는 휴대폰을 강탈당한 장소를 알면 그 일대 호텔 CCTV를 돌려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심어줌. 그러나 초행인 내가, 심지어 길치에 방향치인 내가 그 위치를 기억할리 만무함. 일단 경찰이 출동하여 경찰차 타고 그 일대를 열심히 돌아다녔으나 도난 위치를 확정하지 못함. 결국 경찰서 가서 조서 씀.
8. 경찰 행정은 매우 느리고, 종일 먹은 게 없는 나는 지쳐 감. 여행 이틀 째 오후에 벌어진 일로 여기서 여행을 접고 집에 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게 됨. 그러나 나는 신용카드가 있는 여자이니 휴대폰을 사서 구글맵을 깐다면 여행에 지장이 없다는 긍정회로 가동. 그리하여 조서를 쓰고 밤 11시에 호텔 사장 친구 휴대폰 가게에 가 퇴근한 사장 불러다 가장 저렴한 폰 구입.
9. 계획대로 여행을 강행하기로 하고 이튿날 오전 담불라로 이동. 오후에는 여행 중 가장 큰 비용을 들여 담불라 인근으로 코끼리 사파리를 다녀왔고, 다음날 새벽에는 스리랑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시기리아 락과 담불라 사원에 가 이런 저러 사진을 찍었는데 결과기 너무 구려 짜증. (재드래곤 휴대폰 이렇게 만들기 있기 없기)
10. 캔디로 이동. 호텔 주인 할머니에게 사정을 말하니 아들이 IT엔지니어라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함. 정 많은 스리랑카 사람 특유의 위로라 여겼으나 빈 말이 아니었음. 그렇게 스리랑카 쵝오의 IT 인재와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짐.
11. IT 천재는 아이패드를 구해와 '나의 아이폰 찾기'로 위치를 추적해주려 했으나 내가 애플 아이디/비번 까먹음. (자동 로그인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비번 찾으려면 신용카드 번호나 기타 등등이 있어야 하는데, 최근 신용카드까지 만기돼 교체해 이전에 애플 사이트에 입력해 놓은 신용카드 비번을 알 길이 없음. 기타 등등의 정보 역시 해외에서 확인할 길이 없음. 대충 망필.
12. IT 천재와 이런저런 논의 끝에 아이폰을 찾으려면 다른 아이폰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름. 그러나 스리랑카 제2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캔디에는 애플스토어가 없어 아이폰을 구매하려면 내가 콜롬보로 가든 수수료를 지불하고 폰샵 조수가 밤 사이 콜롬보에 디녀와야 함. 그때까지만 해도 예산이 넉넉한 줄 알았던 나는 후자를 택함. 심지어 이튿날은 주말이라 외화 송금이 안 돼 카드 결제 (수수료 또 추가), 이전에 임시로 구매한 폰은 1/3도 안 되는 가격에 되팔이 (그때도 바가지를 썼다고 한다)
13. 진짜진짜 다행인 건 아이폰은 유심 트레이가 하나라 한국 유심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에서 거액 결제 너님 맞냐고 묻는 전화를 받을 수 있어서 무사히 결제할 수 있었음. 그리고 로밍으로 애플 비번 교체에 성공. 그러나 나의 아이폰 찾기에 도둑 맞은 기기는 전원이 꺼져 있음. 옘병. 그래도 아이폰 겟한 뒤로 사진 잘 나오니 참자
14. 하푸탈레로 이동. 이 시간 이후로 내 인생에 툭툭은 없다! 무조건 버스와 기차로 이동. 립톤싯은 버스 타고 갈 데까지 갔다 걸어 올라감. 나 혼자 걸어갔지만 날씨 좋고 풍경 좋다고 혼자 겁나 씐남. 그리고 그날 밤 잃어버린 아이폰이 켜짐. 이 소식을 캔디 IT인재에 공유했더니 IT천재께서 구글 맵으로 좌표를 찍고 의심되는 폰숍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보내줌. 어서 경찰에 정보를 공유하라고 조언함. 그러나 나는 경찰 연락처를 알 수 없음. 하여 아누라다푸라 호텔 사장에게 정보 공유하고 경찰서에 가줄 것을 부탁하라고 함. 메일도 쓰고 왓츠앱으로 메시지도 보냄. 그러나 무소식.
15. 도둑 맞은 아이폰은 잊고 볶음밥(내 미각이 저 정도로 만족하니 얼마나 다행이야)만 먹으며 버스 타고 눈누난나 여행함. 여행 4일을 남기고 히카두와로 이동. 커플 여행지에 가까운 히카두와에서 혼자 거북이 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내가 짠했는지 호텔 사장이 친구들과 파티에 갈 건데 같이 가자고 제안함. 파티 입장권이 비싸 주변에서 분위기만 즐기는 거니 공짜라고 꼬심. 하여 본 파티 진입 전 아락 한 병을 비우고 가겠다고 함. 나는 파티도 싫고 술이 싫지만 님들과 노는 것은 좋으니 1차만 같이 하기로 하고 술 대신 물을 마시며 함께 떠듬.
16. 그러다 휴대폰 스틸 사건 이야기가 나옴. 술 취한 3인의 98년생들이 몹시 흥분. 내 친구가 경찰이고 아는 형이 변호사고 뭐 다 나옴. 술 취해 쎈척한다고 생각한 나는 이 일을 까먹고 다음 날 또 거북이 찾아 다님
17. 거북이 알을 가져와 부화시키고 방생하는 보호센터에 가서 베이비 거북이들과 하이파이브하고 있는데, 호텔 사장에게 연락 락옴. 경찰서 가야 하니 너무 늦지 않게 호텔로 돌아오라고 함. 당장 튀어 옴. 호텔 사장은 아는 인맥 총동원하여 휴대폰 전문가 집에도 가고 투어리스트 폴이스스테이샨도 감. 그리고 신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아챔. 시큰둥한 경찰서 직원에게 호텔 사장 분기탱천하여 싱할리어로 (아마도) 한국과 스리랑카는 친구고, 우리는 민간 외교관이며, 여행자에게 나쁜 기억을 심어주면 안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속사포로 쏘아 붙이는 듯한 분위기 조성.
18. 히카두와 투어리스트 경찰서에서 아누라다푸라 관광국 겸 투어리스트 폴리스스테이션에 연락함. 히카두와 경찰 서장이 아누라다푸라 경찰 서장에게 연락해 압박한 듯. 이때부터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 몇몇 경찰의 번호를 땄고, 휴대폰이 켜졌던 위치와 시간 등 아누라다푸라 호텔 사장에게 보냈던 디테일 공유함.
19. 저녁 7시쯤 휴대폰을 찾았다며 아누라다푸라 투어리스트 폴리스스테이션에서 연락 옴. 범인 인상착의를 붇고 찾은 휴대폰 사진을 보내옴. 내 커버가 맞음. 이게 가능한 일이야? 3시간만에?
20. 또 다른 문제에 봉착. 이틀 후 출국 예정인 나. 아누라다푸라에서 히카두와는 거의 끝과 끝. 아누라다푸라에서 히카두와까지 휴대폰을 가져다주려면 왕복 픽미 비용을 지불해야 함. 약 140달러. 미안하다, 내가 지금 20만원이 없다. 콜롬보 즈음에서 받을 수 없냐 물으니 지금 경찰서 인력이 부족해 불가능하다는 답이 옴. 대신 아누라다푸라 폴리스스테이션 대빵이 출국일에 공항으로 가져다주겠다고 함. 그러나 호텔 사장과 그의 친구들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내가 가지러 가는 것이 최선이라 충고함. (나는 지금도 그냥 공항에서 받았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듬. 누굴 속이고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음)
21. 히키두와에서 아누라다푸라로, 다시 콜롬보에서 나를 내려주면 계획대로 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며 호텔 사장과 친구들은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택시 수배했으나 가격 흥정에 실패. 결국 내가 그냥 가는 걸로.
22. 다음 날 새벽 4:30에 일어나 히카두와에서 5:30 기차를 타고 콜롬보로 출발, 콜롬보에서 아누라다푸라로 6시간 버스 타고 이동. 경찰서 가서 다시 조서 쓰고, 기념사진 찍고 다시 콜롬보로 6시간 이동하고 나니 오밤중.
23. 경찰 서장은 왜 조서에 휴대폰 도난이라 쓰지 않고, 분실이라 썼느냐고 물음. 정신이 없어 그게 그거라 생각했다고 하니, 도난은 수사 대상이고 분실은 보험처리를 위한 서류를 작성해주는 게 관례라고 함. 도난으로 신고했으면 당연히 수사가 시작됐을 거라 함. 그제야 왜 일주일 동안 수사 진척이 없었는지 알게 됨. 이런 경우 일반 경찰서가 아닌 여행자 경찰서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조언도 들음.
24. 그래서 아이폰 14프로 256g 구매 희망자는 DM으로 가격 제시해 달라….는 게 결론. 풀박이고 캐이블은 미사용임.
결국 뒷목 타고 껍데기 벗겨지며 찍은 아누라다푸라 유적군 사진은 모두 날아감.
순진한 17세의 도둑놈들이 폰샵에서 리세일하려고 전원을 켰으나 비번을 풀지 못해 판매 실패함.
스리랑카에서 아이폰은 매우 비싼 물건이라 폰샵에서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기에
폰샵에 CCTV는 없었으나 주인이 그 소년들을 기억하고 있었음.
도난으로 신고한 게 아니라 분실로 신고했기에 서류상으로 오토바이 운전한 소년1은 무죄,
소년2는 분실물 습득 후 폰되팔이범 정도로 마무리될 거라고 함.
2주 가까이 볶음밥에 요거트만 먹고 살았지만 불만 없음
버스를 갈아 타고 다니느라 덥고 귀찮았지만 툭툭 타면 못 봤을 풍경들을 많이 봄
두유노 비티에스를 외치던 학생들의 하푸탈레 방과 후 과외 현장과 갈레 구두 수선 아저씨,
툭툭 빌려 여행하던 이탈리안 커플, 새벽 어시장 구경시켜주고 사진 찍기 좋은 위치 안내해줬던 시큐리티,
버스 경로우대석에 앉혀주던 시민들과 내릴 위치 알려주던 버스 보조 등등.
2주동안 한국인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고, 한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고독한 여행이었으나 재밌었음.
왕거니 에피도 건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