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배낭 사망 선고 사건
늙어서도 돈이 없고 노는 게 좋은 나는 혼자 여행을 하게 되면 소싯적 버릇 못 버리고 (슈트케이스 대신) 배낭을 꾸린다. 쇼핑을 즐기지 않으니 여행 중 짐이 늘어날 가능성이 낮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수월해 교통비를 줄일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의 인프라가 대부분 수트 케이스보다 배낭에 맞춰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혼자 하는 무계획 장기 여행의 기회는 그리 자주 주어지지 않았고, (출장 시에는 대부분 전용 차량이 배차되므로 배낭이 짐이다) 10여 년 전 구매한 배낭은 2~3년에 한 번씩만 밖으로 나왔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다시는 배낭을 매고 여행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이는 체중과 무관하게 체형을 바꾸고 체력을 좀먹는다. 하여 침낭과 함께 배낭을 당근 마켓에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 내가 위인 반열에 오른다면 적어도 사연 있는 물건 한두 개는 보여주며 모험담을 털어놔야 하는데 삶이 버거워 모두 당근해버려 애장품 같은 게 없다면 인간이 너무 볼품없어 보이지 않겠는가! 하여 위인이 될지 모를 낮은 가능성의 미래를 위해 거둬들였다. 그리고 올해 2월 말, 2주 간의 스리랑카 여행을 위해 배낭을 꺼냈다. 2019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잠자던 배낭이 밖으로 나온 건 4년여 만이다.
짐을 쌀 때는 몰랐는데, 여행지에 도착해 보니 가방 안쪽의 방수 코팅이 부분부분 벗겨져 때처럼 밀렸다. 덥고 습한 날씨에 끈적이는 덩어리들이 물건에 묻어나자 살짝 짜증이 났고,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레고리 홈페이지에 문의했다. A/S가 되는지, 셀프로 처리할 수 있는 도구나 약품이 있는지. 아예 깨끗하게 벗겨내는 방법은 없는지, 결정적으로 (그 비싼) 배낭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등등. 그레고리 공식 홈페이지는 샘소나이트나 아메리칸투어리스트 홈페이지에 다시 문의하거나 매장을 찾아가 문의하라는 답변을 보내왔고, 샘소나이트 홈페이지는 내 메일을 씹었다.
문제의 배낭은 2013년 인도-네팔을 여행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6개월 동안의 긴 여행이었고, 여행의 목적은 먼 거리를 돌아 네팔 포카라 호수를 찾아가는 것과 ABC트레킹에 있었기에, 트레킹 전용 배낭을 택했다. 배낭여행 전용 배낭에 비해 수납 공간이 지나치게 단출했고 어깨와 허리 패드도 얇아 상대적으로 허술해 보였지만, 가볍고 매끈한 것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여 당시 내 형편에 비해 거금을 주고 플렉스했다. 샤방샤방한 배낭들이 출시되는 10여 년 사이 나는 헌 배낭을 매고 동남아 일대와 까미노 프랑세스 등을 여행했다.
이런저런 쿠폰을 써서 살짝 할인가에 구입했지만, 정가에 산 사람들은 배낭의 수명이 10년 안팎이라는 것을 알고 구매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피엘라벤이 G-1000원단을 개발해 안쪽에 방수코팅을 하는 대신 겉면에서 왁스칠로 발수력을 높이는 방식을 택한 이유도 이해될 것 같다. (사실 왁스 레인재킷이나 배낭은 세탁이 불가능하고 옷에 묻어나 선호하는 편이 아님)
어쨌든 하자가 생기기 시작했으니 당근은 어림없고, 캠핑 및 여행 고수들의 조언에 따르면 배낭 코팅이 벗겨지는 것은 원단의 문제라 A/S가 어려울 거라고 하니 내가 안고 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깨끗하게 코팅을 벗겨내고 방수커버를 씌워 사용하는 수밖에. 그리하여 다이소에서 빳빳한 욕실청소용 솔을 사다 두 시간에 걸쳐 손가락이 퉁퉁 불도록 문질렀고, 껍질 벗겨진 배낭은 지금 베란다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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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니 거꾸로 매달린 배낭처럼 나도 울상이다.
진짜로 배낭 매고 하는 여행은 여기서 멈추게 되는 걸까.
여름이 되면 리장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의기소침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