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독후감 숙제는 늘 나를 괴롭혔다. 책읽기는 좋아했지만 내가 원하는 소설책만 읽던 터라 학교에서 독후감을 위해 권하는 책들은 책 읽는 흥미를 아예 떨어뜨려 버렸다. 그래서 내용을 대충 눈으로 훑거나 다른 사람이 쓴 독후감을 베끼기 위해 인터넷으로 찾아본 적도 있다.
그 중 어떻게 써야할 지 전혀 모를 정도로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도입부다. 보통 독후감 첫머리에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가 들어간다. 그런데 원하는 책도 아니고 단지 독후감 숙제 목록에 있기 때문에 읽는 것인데 책을 읽는 이유를 써야 하다니, 난감했다. 그냥 독후감 때문에 읽었다고 쓰기엔 뭔가 세련미가 떨어졌다. 실제로 그렇게 쓴 학우들도 있었다. 그들이 쓴 도입부는 보통 이렇게 씌였던 것 같다.
-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숙제 때문이지만 읽고 난 후에 돌이켜보니 읽기를 잘했다.
그런 독후감은 뭔가 거짓말 같았다. 읽고난 후에 정말 잘 읽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거짓말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독후감 숙제가 끝난 뒤 그 책들의 내용이 두 번 다시 그 학우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들은 나보다 덜 거짓말쟁이다. 난 항상 그 책을 읽게 된 동기를 숙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어떻게든 꾸며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제는 독후감을 강제로 쓸 나이도 지났다. 더 이상 독후감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력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어느 페이지에 어떤 구절이 있는지까지 기억에 났던 것 같다. 나만 그런 줄 알고 좀 대단하다 여겼는데, 나중에 얘기들어보니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뇌가 싱싱해서 그런가 어린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잘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다.
흔히 기억 잘하는 사람을 사진 같은 기억력이라 비교하는데, 내 어렸을 때 기억력은 사진은 아니었던 듯 하다. 비유하자면 블럭이다. 책의 내용을 블럭으로 지었다하면 그 구조물 어디에 어떤 색깔, 어떤 모양의 블럭이 들어갔는지 기억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은 고사하고 책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어떤 구절은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번 보면서 문장 구조도 뜯어봐야 했다. 기억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읽은 책, 내가 느낀 것, 이제는 가물거리며 사라져가고 나는 예전에 보았음이 분명한 책을 새 책인 마냥 다시 읽어야 했다. 내가 그렇게 나이든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뇌도 한창 영양분을 흡수하며 왕성하게 활동할 때다. 내 기억력은 나이와는 무관하게 뭔가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 활동을 별 무리없이 해나가는 걸 보아 정상적인 기억력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수준은 아니다. 옛날엔 기억력이 좋았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지금 기억력이 좋길 원한다.
그러기위해 독후감을 쓴다. 처음부터 독후감이 목적이 아니었다. 사실 독후감을 쓰는 건 왜인지 나를 발가벗겨 광장에 내모는 공포가 든다. 나는 사생활에 민감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생활보다는 사생각이라 해야 하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내가 느끼는 것을 남이 알게 된다는 사실이 꺼려진다.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라면 좋은 생각만 써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좋은 생각만 쓰면 나 스스로를 숨기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나쁜 생각을 써제끼면 욕을 먹을 게 뻔하기 때문에 그 어느 선 가운데에 서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섣불리 써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내가 쓴 글을 보고 나를 쉽게 판단하지 않을까, 내 생각을 알려주면 나약해 보이지 않을까.
그 누구도 나에게, 내 글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없는 것은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글을 쓰는 것은 꺼려진다.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딱히 글을 쓰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여태껏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와서야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별 거 없다. 남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답답해서였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책이 그렇게 잊혀지는 것이 슬퍼서다. 그 책에 대해, 내가 읽은 그 시기에 대해, 그 때 느꼈던 모든 것들이 안타깝기 때문에 독후감을 써서 남기는 것이다.
책은 생각이고 마음을 담고 있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가. 저자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본인의 인생을 갈아 넣고, 또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여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저자가 성심성의로 알려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대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 대화를 기억하기 위해, 나는 독후감을 쓴다.
지금 쓰는 독후감은 학창 시절에 썼던 숙제보다 더 마음이 가볍다. 거짓말로 꾸며내지 않아도, 내가 있는 그대로 써도 나에게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설사 누가 뭐라 한 들 그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기엔 내 뇌가 너무 굳어있기 때문에 거칠게 없다.
독후감을 왜 쓰는가? 쓰고 싶어서 쓴다.
그 책을 왜 읽는가? 읽고 싶어서 읽는다.
이렇게 내멋대로 독후감을 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