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이 작가 전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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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p.16)
이진이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등장하는 주인공 한탸의 고백이 오버랩된다. 1960년대 공산 체제하의 프라하가 배경인 이 소설은 당시 엄혹한 현실 속 작가의 심경을 폐지 압축공의 삶과 고백을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낸 자전적 소설이다. 더럽고 냄새나는 지하실에서 폐지 압축기와 씨름하면서도 그곳에 던져진 빛나는 책들을 건져 내어 그 속에 빠져들곤 하는 한탸. 그의 고백은 그가 처한 삶의 야만성이 어떻게 극복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해준다.
‘그림 속에서는 뭐든 가능한 또 다른 세상’이라는 작가의 고백 속에,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한참 동안이나 음악을 들어야 하고, 음악에 몰입하면서 그림에도 몰입할 수 있게 된다’는 작가의 해설이, 어쩌면 자신의 삶과 괴리가 있을지도 모를 또 하나의 세계, 그의 꿈속 아름답고 더 진실에 가까운 세계로 도달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화려하고 유쾌하며, 강렬한 색감과 다양한 오브제로 장식된 작품들. 독특한 형태와 창의적인 구성. 이진이 작가의 작품들은 굳이 의미를 읽어내려 하지 않아도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시선을 사로잡는다. 심지어 단색조로 톤다운시킨 작품에서 조차 화려함이 차오르며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예리한 눈과 뛰어난 손을 가진 작가의 재능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단순히 색채 실험이나 멋진 구도, 혹은 어떤 인상적인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보다 작가의 삶의 이야기이며, 그의 희로애락이고, 투쟁과 절망의 몸짓이자 마침내 얻어진 평안과 기쁨, 아직도 찾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기다림이자 인내이며, 소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가 주로 그리는 자화상 시리즈를 살펴보면, 그 표정과 기운 속에 따뜻함과 차가움이 동시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딘가 슬프고, 차가운 응시 속에 인내와 기다림이 있다. 심지어 무표정 속에도 자애와 깊이가 보인다. 그림 속 굳게 다문 입술이 표정 언어를 강화하듯 무슨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고, 그가 지닌 화려함으로도 읽어낼 수 없는 어떤 이야기. 그것은 화려한 침묵이자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도 닮아있다.
현실을 잊게 하는 마술과도 같은 세계, 무엇이나 가능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에 몰입하여 세상을 이기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현실이 되어 작가가 처한 공간을 채우며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마음이 가난하여 채워짐을 갈망하지만, 다시 욕심이 생겨 비워지기를 소망하며, 작업 속 세계에 몰입하니 가장 이진이 다운 모습으로 살게 된다.
“화려하게 채워져라…
스팽글
천
컬러
면
그리고
허기진 맘 조금” (인스타 Jin-e690508)
작업에 열중하는 작가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작가는 채워져 가고 성숙해진다. 어떤 작품은 단 하루 만에 끝내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며칠,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걸려도 완성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의 의도와 작품을 진행해 나가면서 겪게 되는 삶의 변화들, 그때마다 겪게 되는 심경의 변화만큼이나 컬러를 바꿨다는 고백… 한 사람인데 그 안에 여러 사람이 있는 듯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가볍게 시작하다 욕심이 생겼고, 그 욕심을 누르다 보니 답답해 다시 색을 쓰고, 색과 형태와 사흘을 씨름하다 이젠 놔줘야겠다’고 다짐하기까지. 그의 그림 이야기는 삶이자 사랑이며, 보고자 하는 자에게만 보이는 화려한 침묵의 언어이다.
그리고, 붙이고, 긁어내고, 덧대고. 그 위에 다시 칠하고, 붙이고, 장식하고, 꿰매고. 그 행위는 마치 오랜 수행과도 같고, 일상을 잡아줄 다림줄이 되기도 한다. 작가를 벅차게 하고, 채워지게 하는 행위이다. ‘색의 유희’ 작업을 진행하면서는 화려한 색상 위에 검은 에너지를 그려 넣었다. ‘신기하게도 그 에너지가 아래로 향할 때는 모든 게 땅으로 가지만, 위를 향할 때는 상승하는 효과가 있더라’고 이진이 작가는 고백한다. 그의 작업은 이렇게 그에게 기도이고, 실제 하는 에너지로, 삶의 또 다른 진실이 되어간다.
때로는 자화상에 얼굴을 그려 넣을 수 없을 때도 있었고, 그저 표정을 알 수 없는 검은 형태로 자신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제목도 그저 ‘a girl’이다. 일반명사화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때 조차도 그림 속 소녀가 입은 의상은 더없이 화려하고, 그 배경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모순된 두 세계를 한 작품 속에 다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침묵하며 작품 속에 숨었다. 화려한 익명성 속에. 화려함으로 덧대어진 또 다른 세계 속에.
최근 작 ‘마음’ 시리즈는 빈 마음이 채워졌고, ‘마음속 덧대어 포장하기’라는 제목으로 무수히 덧대기 작업을 ‘수행’ 했다. 마음속 쭈그리고 앉아있는 얼굴 없는 a girl을 보듬고 치유하는 행위로써, 예쁘게 꾸미고 아름답게 포장하여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이, 이제는 작업 속 진실이 현실이 되어 이진이 작가 특유의 익살과 색깔이 더 찬란히 빛나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 전시오픈 : 2019. 6. 21~7. 21. 강남유디치과(뱅뱅사거리) 내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