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일상ㅣ30년 만의 무모한 도전

by 흰 점

낮 12시 반까지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정상 도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작은 뒷동산도 오르내리지 않던 우리가 젖 먹던 힘을 다해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한 것은 12시 15분. 잠시 쉬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에너지를 충전해 정상으로 향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단한 길. 무거운 다리를 간신히 옮겨 한 걸음 한 걸음. 다만 마지막 이 코스는 절경 중에 절경. 숨 막히는 장관에 고단함을 잠시 잊고. 그 산이 주는 묘한 기운을 받아 결국 정상에 다다랐다.


출입이 통제된 백록담을 멀리서 바라보며 30년 전 저 밑 분화구에 고인 물가 근처까지 뛰어 내려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에 누군가 우리에게 휘슬을 불며 다가와 저지하였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가물거리는 기억과 함께 갓 스무 살 파릇했던 시절이 눈 앞에 펼쳐진 풍광과 함께 신비한 에너지로 기운으로 내게 더해지는 느낌. 오늘 함께 한 두 딸의 싱그러움이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15분. 싸가지고 온 것을 먹고, 사진을 찍고, 잠시 한라산의 아우라에 젖어들즈음 우리는 서둘러 내려가라는 안내방송을 듣는다. 가는 길이 험난하고 생각보다 길 것이니 속히 하산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것이라는 뉘앙스였다. 음... 아쉽지만 뒤쳐지는 딸들을 부추겨 하산을 시작하였다. 삼각봉 대피소까지는 비교적 길이 잘 되어 있고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매료되어 1시간 40여분 만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 잠시 쉬어 발을 내딛는데, 온몸이 아파 발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함께 한 두 딸도 마찬가지인 듯. 이 악물고 정신력으로 선두에 섰으나 급기야 터져 나오는 큰 딸의 울음, 막내의 다리 경련. 아아.. 절경은 다 사라지고 무모한 도전의 후유증이 온몸을 치고 들어오는데.. 오로지 생존에 대한 생각만이 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 아찔하고 위험한 순간들을 간신히 통과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온 오만함일까. 산을 얕잡아 보았구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고 나도 그중 하나 일성 싶었던가. 어쩌자고 딸들을 부추겼을까. 설마 조난을 당하지는 않겠지. 얼마 전 한라산에서 조난을 당해 1주일을 홀로 버텨 기적적으로 생존했다던 어떤 이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그이는 방수 외투를 입었고, 물과 약간의 식량이 있었던 듯.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장비도 없다. 게다가 딸들은 반팔에 반바지. 물도 다 마셔 작은 아이는 경미한 탈수 증세마저 보이고. 아아 이를 어쩐다.

전두환 시절. 행사에 동원된 젊은 공군들이 추락했다던 원점비 부근. 산을 오를 땐 잠시 머물러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과 그 유족들의 슬픔에 마음을 조아리며 맘 속 깊이 하늘의 위로를 빌었건만, 하산할 적엔 그들의 넋에 기대 그만 그곳에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 한라산 본부에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하산하니 날은 금세 어두워지고, 어렵사리 찾은 식당에 앉아 시간을 보니 밤 9시. 때늦은 손님을 친절히 대해주는 분들께 감사하며 초점 잃은 눈에 생기를 되찾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했던 그 순간. 힘겨웠던 그 날의 어리석음은 어느덧 추억으로 각인되고. 이제는 산을 오르려면 힘을 배분하여 사용해야 하고 도전의 폭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삶의 무엇 하나 그와 같지 않은 것이 있을까 싶지만은. 그 위협적인 경험조차 한라산이 준 감동을 훼손하지 못하고, 그 산이 품은 신비를 앗아가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는 조금씩 산을 더 알아가고 싶다. 한 걸음씩 겸허하게 그 속을 탐험하고 힘써서 흘린 땀방울이 주는 보람을 간직하고 싶다. 느린 걸음으로. 때로는 멈추어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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