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바친 떡 집' 이야기

가치가게 - 심층 인터뷰

by 흰 점

세류3동 제로 마트 사거리에서 버드내 도서관 쪽으로 세지로를 따라 1-2분 걸어가면 파란 간판의 <어머니 떡방앗간>이 눈에 띈다. 매대에 진열된 떡을 확인하고 그 안에 들어서니 벽 정면으로 두 개의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사훈’이고, 또 하나는 ‘경영방침’을 적어놓은 것이다. 떡집에서 흔하지 않은 모습에 대뜸 ‘저거 누가 걸어놓으신 것’인지 묻게 되었다. 짧게 ‘아들’이라는 대답에 시선이 다른 벽 중앙에 걸어놓은 또 다른 액자로 쏠렸다. 그 액자에는 <어머니>라는 제목의 ‘시’가 걸려있었다. 혹시 이것도 아드님이 쓰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사장님께서 수줍게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보기 드물게 대를 이어 운영되는 떡집이었다. 떡 장인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문뜩 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몇 번 더 찾아가 뵙고 결국 어머니를 인터뷰하게 되었다. 어떻게 떡 장인이 되셨는지, 어머니의 대를 잇기로 결정한 아드님에 대해서도 궁금했고, 이 동네에 오래 사신 분으로서 동네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했다.


“찹쌀이라고 빻아 놓으면 맵쌀이 되고, 맵쌀이라고 빻아 놓으면 찹쌀이 되고, 모르니까… 그래 실수를 참 많이 하다가 혼자 터득을 해가지고…”


떡 기술을 누군가에게 배우 신적이 없이 혼자 터득하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 떡집을 하기로 결정하고는 5평 작은 떡집을 인수하여 기술자를 한 분 두었는데, 당시는 기술자에 대한 우대가 커서 그분의 숙식을 모두 해결해주고 돈도 다 주고 나니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 상황이 미안했던지 기술자는 가버리고 결국 혼자 이것저것 실험하며 떡 기술을 터득하신 것이다. 참쌀 맵쌀 구분도 어려웠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계속 실험하시면서 결국 웬만한 떡은 다 만들어 내는 경지에 이르셨다. 이제는 이 일만 32년째. 당신이 기술자가 되셨고, 동네에서 유명한 떡집이 되었다. 이사를 가도 일부러 멀리서도 찾아오는 그런 집 말이다.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걔는 좀 가르쳤어요. 석사도 있고. 외국에서 자격증도 따고 했는데.

다 때려치우고. 엄마 아프고 하니까 엄마 보고 산다고… 다 때려치우고 와서는, 아버지랑 많이 싸우고… 결국 아버지가 졌어.”


많이 배운 아들이 고생스러운 일을 이어가겠다는 말에 아직까지도 맘이 쓰이시는 어머니. 어려운 결정을 하기까지 아드님의 고민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를 위해 직접 써 걸어놓은 아들의 ‘시’에는 어머니를 향한 존경과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어머니의 삶을 보아온 아들의 시선. 그 힘겹지만 아름다운 여정을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라임을 맞추어 그 이유를 함축적으로 써놓았다.


그 어머니는 50년 넘게 세류동에 살면서 32년째 떡을 만지고 사셨다. 세류동에 오기 전, 그러니까 한창 젊을 때는 바느질, 재봉틀, 뜨개질 못하는 것이 없었고, 일을 천 가지 만 가지 다 하셨다고 한다. 수도 얼마나 예쁘게 놨는지 모른다 한다. 십자수를 특히 잘 놓으셨고 식탁보, 베갯잇, 횃대보(옛날에 옷 가리게 벽 가리개용으로 사용) 등 이제는 방법을 다 잊었지만, 기회가 있다면 더 배우고 봉사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신다. “시간이 나면 복지관에도 가고, 컴퓨터도 배우고, 한자도 배우고, 나이 들어도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은데…”

하지만 시간이 없으시다. 떡 장사는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직업이라고. 새벽에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2-3시면 일어나 떡을 준비한다. 아침 일찍 납품해야 하는 주문이라도 들어오면 새벽 1시에는 일어나야 한단다. 게다가 집안일도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이 떡집에다가 평생을 바치고… 정말로 집에 꽃이 피는지 뭐 새가 우는지 모르고 살았어.”


떡집에 바친 인생은 남편과 네 자녀에게 바친 인생일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훌쩍 75세가 되어버린 것. 이제는 아들이 그 어머니의 노고에 감사하며 노래하며 어머니의 일을 이어가고 있다.


“내 친구 아들이 딸을 낳았어. 걔 100일 떡을 내가 해줬어. 그 애가 자라 시집을 갔어요. 또 아기를 낳았어. 그 아가 100일 떡도 해주니까 맘이 이상하더라고. 대를 내린 거잖아… 내가 이렇게 살았나? 이렇게 살았네…”


그렇게 이웃들의 경조사를 챙기면서 쉬는 날도 없이 일하셨다. “어쩌다 쉬기라도 할라치면 꼭 주문이 들어와. 아들은 그냥 쉬라 하지만, 그 사람한테는 특별한 날인데 어떻게 안 해줘?” 그런 성품이신 거다. 그런 어머니는 주변 외국분들에게도 친절하시다. 세 살던 중국분이 이사 가면서 쌀로 만든 만두를 한 솥 해다 주셨다 하는데, 우리랑 다른 방식으로 만든 그 만두가 그렇게 맛이 있었다며, 편견 없이 보면 ‘참 좋은’ 분들이라고 이야기하신다.



변해버린 동네 풍경, 이웃과 동네 사람

“예전에는 여기가 다 과수원. 저 알로는 공동묘지였어요. 그때는 산소가 20평씩 됐어요. 사람들이 산소를 파가 집을 한 채씩 짓다 보니 집이 생긴 거야. 집 지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해. 근데 그냥 막 짓는 거지. 그러려면 하룻밤에 다 지어야 해. 그냥 기둥 세워서 지붕 덮어 놓는 거야. 솥 걸고. 그러면 못 부숴. 그런 세월을 살았어. 나는 산소를 한 자 파면 얼른 가서 밭을 만들어. 고구마도 심고 깨도 심고… 그러면서 살았어. 그 시절에는…”


동네의 옛 모습이 궁금하다는 말에 50여 년 세월 동안 보아온 이야기를 해주신다. 이 지역에 녹지가 없어 답답하다 했더니, 실은 여기가 다 녹지고 산이고 과수원이었다고. 그러던 어느 해, 동네가 갑자기 다 정리되었다고 한다. 불도저가 들어와 과수원도 산도 다 밀어버리고 동네를 분할해서 자로 잰 듯 똑같이 구획했다. 사각형의 틀 안에 직선으로 줄을 긋고 다시 가로로 줄을 그어 그 속에 동네를 집어넣어버렸다. 물론 그 후로도 동네는 계속 변화해 나갔다. 건물이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고, 지역 주민들도 끊임없이 바뀌었다. 어머니의 시선에는 그래서 ‘동네 사람’과 ‘이웃’이 구분이 된다. 계속 바뀌는 이웃이 있고, 오래 산 동네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좋은 거를 모르겠어. 저기가 시골에는 한 동네야. 한 동네가 한 열 채 정도밖에 안 돼. 한데 저기는 한 채에 열 다섯 집이 살아.”


빌라 한 채가 한 동네라… 열 채의 집이 한 동네를 이루던 시절. 산과 들이 있고, 과수원이 펼쳐지고, 저 아래 버드 내천이 흐르고, 반대쪽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열다섯 채를 이고 선 빌라가 길 따라 구석구석 박힌 오늘의 상황에서는 잘 그려지지 않는 그림. 한 건물이 한 마을이라… 열 채 한 마을을 살아보신 이의 눈에만 보이는 풍경일 것이다.


50여 년을 한 동네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동네들을 경험하며, 빠르게 스쳐가는 이웃들 얼굴도 알아차리기 전에 세월이 다 가버렸다. 나무처럼 꿋꿋하게 한 동네에 뿌리내리고 온갖 풍파 다 겪으며 자식들을 품으셨다. 떡집 어머니의 이야기에 가슴 먹먹해져 이 글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한참을 망설였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으나 부득이하게 일부분만 담았다. ‘가치 가게’에서 준비하고 있는 ‘버드나무 이야기’의 첫 초대손님으로 모셔야겠다 다짐하며, 아드님이 적어놓으신 사훈과 경영방침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사훈 – 건강, 화목, 번창

경영방침 – 품질 신뢰경영, 성실 친절경영, 개발 혁신경영


부디 사훈처럼 건강, 화목, 번창 하시라!



(인터뷰에 도움 주신 분: 김주현, 백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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