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에 앞선 가치, 살림을 살다.
근래에 들어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를 종종 떠올리게 된다. 마음씨 착한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살려주고, 사슴의 도움으로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의 날개옷을 숨겨 하늘로 가지 못하게 한 뒤, 자신과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기까지 그 비밀을 꽁꽁 숨겨놓았던 일. 어느 날 나무꾼이 슬픔에 잠긴 선녀가 가여워 날개옷을 주게 되자 선녀는 곧바로 그 옷을 입고 아이 둘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사슴이 나무꾼에게 아이 셋 낳을 때까지 절대로 날개옷을 주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을 나무꾼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던 듯. 그의 행동이 너무 경솔해서 어린 마음에 속상해했던 기억이 있다. 선녀의 행동은 야박한 것이었고, 나무꾼의 행동은 너무 착한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제 결혼 22년 차, 적어도 나는 나를 나무꾼에 감정 이입하지는 않게 되었다. 비록 선녀는 아닐지라도 결혼 전 품었던 꿈과 희망, 세상을 향한 기대가 마치 선녀의 날개옷처럼 어딘가에 처박혀 쉽사리 발견되지 않고, 이제는 그것을 발견하리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이 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가사와 육아의 짐을 홀로 짊어져야 했고, 적게나마 경제활동도 병행해 가면서 딱히 대상도 없이 외롭게 싸워온 세월이 20년이 넘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공사다망한 남편과 소위 집안일의 책임을 나눈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수한 좌절과 포기, 낙담. 어쩌면 그 보상으로 주어진 인내와 절제가 이제는 나의 새 옷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장성한 두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그러나 내 딸들만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연 이러한 현실의 울타리에 갇힌 여성이 어디 나 혼자이겠는가.
그림자에 갇혀버린 가사노동, 그 비극은 모두의 몫
가정에 주인을 상정하고 그 주인을 ‘남성’으로 명명하는 가부장제가 존속하는 한 선녀와 나무꾼의 비극은 여전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매개가 되어 이루어진 가정이라면, 그에 따르는 책임을 나누는 것이 당연하고, 나누어진 책임이 어떤 것은 가치 있는 것으로, 어떤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산업사회에 이르러 ‘돈’을 벌어올 수 있는 ‘임금노동’과 그 임금노동을 뒷받침하는 무보수의 ‘가사노동’이 묘하게 구분되면서, 생계를 위한 둘의 노력이 하나는 가치 있는 것으로, 하나는 무가치한 것으로 나뉘게 된 것이 어쩌면 오늘의 비극을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래로부터 가사노동을 여성이 전담한 사례는 많지만, 이렇게 심하게 그림자에 갇혀버리게 된 것은 ‘자본 획득’의 가능성과 직접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지. 얼마 전 한 정당에서 당원들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이혼’이라고 답한 사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절박함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사회적 불평등이 가정 내에서도 위계를 만들고, 불평등한 구조를 그대로 재생산하는 형국.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아내는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소위 ‘슈퍼우먼’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게다가 혹여 자녀가 조금 엇나가게 자라는 경우가 생기면 그 책임 또한 아내가 뒤집어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 세대가 바뀌어 남자도 종종 집안일을 돕는다고 하지만, 실은 함께 꾸려가야 하는 일에 ‘도움’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 자체가 불평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도 처음 가정을 꾸렸을 때, 남편은 가끔 본인이 원할 때 집안일을 거들지만, 여성인 나는 늘 똑같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결코 가사노동을 놓을 수 없던 현실이 절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로 인한 다툼도 잦았지만, 대부분 소모적이었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던 것 같다. 이제는 그나마 이골이 나서 그런지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지만, 남편과 함께 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책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정신의 발달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부분이 있다.(Jtbc차이나는클라스 37회 재인용) 첫 번째 단계는 낙타의 단계인데, 낙타에게는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다. 주인에게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비굴함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상태를 지나야 진정한 자유를 획득한 사자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데, 다만 중요한 것은 낙타의 단계를 충분히 강하고 인내력 있게 지나야 한다는 것. 즉, 정신의 억센 힘을 획득하기 위해 무거운 짐, 가장 무거운 짐을 낙타처럼 무릎을 꿇어 충분히 실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인내력 있는 정신을 획득하고, 이제는 사자처럼,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힘은 다음 단계인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위한 자유를 준비하는 것으로, 마지막 단계인 어린아이의 단계에서 완성된다. 그는 이 단계에서 어린아이가 가진 순결함과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이렇게 노래한다.
“…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어린아이가 가진 뒤끝 없는 망각이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하신 것과 같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눅9:23)고 하신 말씀을 전제한다.
살림, 돌봄의 가치에 대한 자각
문득 생각해 보면, 홀로 짊어져야 했던 가사노동과 육아의 짐이 어쩌면 내게 이와 같은 단계를 밟게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어쩌면 아직 낙타의 단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짐이 확실히 나를 성장하게 한 것은 틀림없다. 가사 일이 단순히 가사노동을 넘어서 ‘살림’이라는 것, 육아가 ‘돌봄’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때로는 이 영역에 남편이 함께 일을 나누어야 할 상대로서가 아니라 돌봄의 대상으로 위치 매김 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불공정하다 느껴졌던 마음이 많이 누그러진 것은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우리의 삶의 이슈가 더 이상 ‘공정함’이 아니라 ‘연민’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가부장제가 안겨주는 짐은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 혹은 ‘머리’가 되는 남성에게도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살림에서 얻어지는 아기자기함과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서 얻어지는 동반성장의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없다는 것은 거의 재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살림은 먹고사는 데에 필요한 일차적인 생존능력이다. 그것은 ‘나’를 살리고 ‘가족’을 살린다. 늘 반복되는 지난한 과정이지만, 하루하루 ‘생’을 돌보며, 인내를 키워가고, ‘삶’에 대한 상상력과 여유를 생산해 낸다. 그것은 ‘돌보는 것’이며, 정신적인 성장을 가져온다. 의무에 앞선 어떤 가치가 숨겨져 있다.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아이들, 그리고 남편. 한 아이를 낳고 조금 적응이 되었는가 싶었더니 첫 아이와 전혀 다른 둘째를 낳게 되고, 한 배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다른 성격, 선호, 관계하는 방식, 각자만의 세계…. 그것이 처음에는 힘들었다가 차츰 깨닫게 되는 세계와 세계와의 결합, 더해서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확대되는 것 같은 어떤 단계적 상승. 작은 한 인간이 가진 저 큰 세계와 그 안에 넘쳐나는 무한한 기대, 가능성, 사랑….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놀라운 존재들을 내가 대하고 있다는 자각. 놀라운 기쁨이었다. 그로 인해 얻어진 미소와 여유. 함께 겪어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다만, 이제는 주름진 얼굴에, 한 때나마 품었던 전혀 다른 꿈들이 저기 멀리 아지랑이처럼 시야를 흐린다는 것이 서글플 뿐이다. 이 놀라운 길에 함께 짐을 나눠질 동반자가 있었다면, 함께 성장하고, 함께 공유할 이야깃거리가 더 풍성하지 않았을까. 소위 바깥일에 치여 검은 얼굴 침묵하는 남편을 보는 마음도 편치 않고, 우리의 삶에 예기치 못한 외부적 요소들이 이물감 있게 끼어든 느낌도 개운치 않다. 과연 이러한 현실을 누구 탓이라고 하겠는가. 사회적 요소가 분명히 있고, 정치 탓을 할 수도 있겠으나 함께 사는 삶에 어렸던 두 낙타의 비극이 아닐 런지.
요즘은 그래서 시간을 돌이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나씩 손으로 하는 일에 의미를 두고 배우고, 가급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도모하며, 경제적 보상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려고 한다. 아직 어리고 예쁜 두 딸에게도 일찌감치 누군가와 일을 함께하고, 나누고, 연대하는 법을 익혀두라 조언한다.
우리 모두에게 이제는 '사랑'과 '서로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할 때가 아닌지. 그것이 살림의 본질이고, 의무에 앞선 가치가 아닐까.
-아카이브 매거진 빼꼼 #2 기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