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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칭찬 한 마디

청자몽 연대기(11)

by 청자몽

(전공이랑 아무 상관없었는데..) 프로그램 공부를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열한 번째 이야기 :




국문과 학생이 전산과 전공 필수 과목을
수강신청한 이유



4학년 때 수강신청할 때 보니 학점이 애매하게 남아서, 다른 과 수업을 교양으로 들어도 될 것 같았다. 같이 비평 공부하자는 친구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미술대학의 '미학' 수업을 신청했다. (재미없을 거 같았는데, 있어 보여서 신청했다가 약간 후회를 했다.)

친구의 꼬드김 말고, 내가 좋아서 선택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뜬금없이 전산학과의 1학년 전공필수 과목인 '전산학개론'을 신청했다. 그들에게는 전필(전공필수)지만, 나는 타과의 학생이기 때문에 신청해도 교양과목이 됐다.

국문과는 학과코드가 1번이어서, 쭈뼛거리며 수업 들으러 간 날 출석 부를 때부터 주눅이 들었다.





"국문과 이현주"

"네!"

(쑥떡쑥덕..)





가뜩이나 공과대학 교실도 헛갈려서 뻘쭘하게 찾아왔는데 말이다. 왜 학과 코드가 1번인 거야. 덕분에 지각 한 번도 안 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전산학개론'이었는가?
1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컴퓨터 학원이 재밌어서 아니 수업을 들을만해서, 그냥 2학년 1학기까지 1년 가까이 다녔다. 다닐 때 그냥 다니지 않고, '정보처리기능사' 시험 과목에 맞게 수업을 찾아다녔다. 자격증 따놓으면 나중에 취직할 때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2학년, 한 두어 번 떨어지고 겨울에 정보처리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다. 필기/ 실기 수험서를 공부해서 간신히 딴 건데.. 그래도 자격증 따니까 왠지 컴퓨터가 덜 무서워졌다. 워드프로세서 아래 아 한글 단축키를 달달 외워서 현란하게 다루며 좋아했다.

3학년, 겨울쯤부터 들어서, '정보처리기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래서 수업도 한번 들어볼까? 싶었다. '전산학개론'이니까!




이론 수업은 달랐다.


자격증 땄다고, 컴퓨터를 안다고 생각한 나는 꼭 우물 안 개구리 같았다. 그건 그 거구, 실제는 달랐다. 당연하다.

전산학개론 첫 시간에 들은 데이터에 관한 정의가 인상 깊었다. 세상에는 떠도는 수많은 정보가 있는데, 그걸 모아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고 규칙을 정하면 그게 바로 '데이터'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보는 무엇, 내가 읽는 사소한 것은 그냥 공중에 흩어져버릴 의미 없는 게 될 수 있지만, 그것들을 한데 모아 체계화시키고 가공하면 값진 무엇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멋진데!

유학 다녀오신 지 얼마 안 된 교수님의 발음도 생각이 난다.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데이더베이스. 러 비슷한 더라고 들렸다. 뭔가.. 뭔가. 다르군. 그리고 뭔가, 이게 내가 자격증 종이 하나 있다고 큰소리친 게 부끄러워졌다.

수업을 진지하게 잘 들었다.
전공수업보다 더 열심히 들었던 거 같다. 역시 사람이 자기가 뜻이 있어야 움직이게 되나 보다.

리포트가 아니라, MS Access로 프로그램을 짜서(basic) 제출하는 게 과제였다. 윈도우 3.1 까는 것부터(1995년 당시) 잘 안 됐다. 숙제는 고사하고 운영체제 까는 것부터 안 되다니... 어디 물어볼 곳도 없고 해서, 그냥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갔다.

윈도우95도 그랬지만, 윈도우3.1은 플로피 디스켓으로 설치를 해야 했다. 교수님은 웃으시면서 차근차근 잘 가르쳐주셨다. 궁금한 게 있어서 질문도 여러 번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유치원 현관 유리창이 예쁘게 여름답게 꾸며진 게 보였다. 고래와 인어공주, 물고기. '실패해도 괜찮아' 괜찮긴 괜찮은데.. ㅅ이 사라졌어. 얘들아! 진짜 괜찮은 거니?!! ⓒ청자몽


시험 잘 봤고, 과제도 잘 제출했다. 액세스로 '도서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처음 만든 프로그램이라 뿌듯했다.

마지막날이던가? 아니면 지나가다가 만났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어느 날 교수님이 물어보셨다.





"컴퓨터랑 잘 맞아 보이는데, 전공해 보지 그래요? 부전공으로.."

"네?! 아.. 네. 그렇잖아도 저도 잠깐 생각해 보고 알아봤는데, 계열이 완전히 달라서 안 된답니다. 인문대학하고 공과대학이라서요."





그렇군요. 아쉽네. 수고했어요.
칭찬을 받다니! 정말 좋았다. 그러고 보니, 전공 교수님께 칭찬받은 적이 없어서.. 뭘 잘했다는 칭찬받은 건 그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4학년, 그것도 교양수업이었는데 말이다.

잠깐 들은 칭찬인데도 기분이 좋아서, 생각이 났다. 그런가? 과제할 때 뭔가 내 손으로 만들어내는 게 신났는데.. 이걸로 뭘 해볼 수 있을까 없을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있구나. 싶어서 뿌듯했다.

마음에 작은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거였다.




에피소드


"이야. 이현주. 너 그러기냐? 4년 내내 내 연구실엔 한 번도 안 오더니... 옆방 전산과 교수님이 나보고, 너 칭찬하더라. 자기 전공도 아닌데, 진짜 열심히 하더라고. 잘 안 되니까 계속 찾아와 묻더라고. 내 옆방인데.. 심하다. 그렇지?"


우리와 나이 차이가 그리 나지 않던, 고전문학 교수님이 막 뭐라고 하셨다. 그러게요. 왜 저는 전공엔 별로 관심이 없었을까요? (긁적긁적)

관심이 있어야 움직이나 보다. 그래야 문 두드릴 용기가 나는 모양이다. 그때도 그러더니,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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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첫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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