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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 사회생활 초창기에 만났던 사람들

청자몽 연대기(18)

by 청자몽

막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열여덟 번째 이야기 :




사람 이야기


2시의 하늘. 2시에는 환하고 밝아서 볕 받으며 걷다보면 하루가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러다가도 4시반쯤 되면 해가 져버린다. 하루가 참 짧다. ⓒ청자몽


"일, 사람, 돈. 회사 다닐 때 3가지 중에 하나만 만족하면 다닐만한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들을 때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는데, 나중 나중에 생각해 봐도 맞는 말이다. 3가지 중에 하나라도 맞으면 살 만한 거다.

그중에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 때문에 다니고, 사람 때문에 힘들고, 사람 때문에 망가지고 속상하다. 사람들한테 배우고, 사람들한테 치이고, 사람들 덕분에 살고..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매일을 살았던 것 같다.

회사 다니는 내내 사람 생각을 많이 했지만,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사회생활 초년생 때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고마웠던 분


월급 못 받고 그만둔 첫 회사를 퇴사하고 아르바이트로 도움말 작성하는 일을 했다. 감사하며 일해야 하는데, 아직 어리바리 사회초년생이라서 실수가 있었다. 행동이 미숙하다고 해야 할까?

도움말 쓰면서 프로그램 테스트도 같이 해달라고 했다. 지금 같으면 아무 말 않고 네네. 하면서 할 텐데.. 그때는 화가 났다. 도움말 쓰고 도움말 파일 만드는 일(90년대 중후반에는 도움말도 빌드(?)해서 파일로 만들어야 했다.) 하러 간 거 아냐? 왜 없던 일을 하래?

화내면서 딱 하기로 한 일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무려 대표님이 테스트 좀 하라고 한 건데! 알바가 딱 자기 일만 하고 관두겠다고 하니까 철없어 보였나 보다. 살짝 시끄러웠다. 지긋하게 나이 드신 경리 과장님이 잠깐 보자고 하셨다.

뭐라고 하셨는지 내용은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느낌은 아직도 생각난다. 꾸짖으신 게 아니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일단 일부터 하고 내가 생각했던 부분은 좀 더 현명한 방법으로 풀어가는 건 어떨까? 하는 이야기였던 거 같다.

아직까지 느낌이 생각나는 이유는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잠깐 일하고 가는 알바인데도 진심으로 걱정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선배가 된다면 저렇게 따뜻하게 이야기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하고 보자. 그리고 현명하게 풀어가자. 를 배웠다. 사람의 말도 중요하지만, 태도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IMF 때였나 그 직후였나, 그 회사도 어려워져서 결국 문을 닫았다고 한다. 실력 좋은 분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버티기도 힘든 때였다.




고마웠던 분들


자리 못 잡고 이래저래 방황을 하다가, 어렵사리 회사에 들어갔다. 신입 같지 않은 중고 신입이었지만, 감사했다. '최소한 1년' 짜리 경력을 만들자 하며 다부진 결심을 했다.

90년대 말이었는데, 당시에 여자 개발자가 많지 않았다. 분명 개발직이지만, '여자'인 게 문제였다. 출근하면 컵 씻고, 정리를 해야 했다.

전에 잠깐 있던 어떤 회사들에서는 장보기도 했다. 화장하고 다니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철야나 밤샘이나 야근 때문에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대중없어도 출근은 칼 같이 아침 9시에 해야 했던 곳이었다.

여기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직원의 일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전날 사용한 컵들을 들고 화장실로 가서 설거지를 했다. 한겨울에 찬물로 설거지 하다가 울었다. 손이 시려서 운 건지 내 처지가 서러워서 운 건지 모르겠다.

이곳에서도 역시 일하다가 전화도 받아야 했고, 손님들 오시면 커피도 타서 드려야 했다. 여직원인 게 문제인 거다. 이랬던 문화를 어느 혁신적인 대리님이 들어오셔서 확 바꿔버렸다.

도자기 컵을 종이컵으로 바꾸고, 커피는 당번을 정해 타드리는 걸로 바꿨다. 안 바뀔 것 같던 문화가 바뀌는 걸 보게 됐다. 사람이 중요하구나. 하고 놀랐다.

감사했던 회사에는 실력자 선배들도 많아서, 일하는 걸 곁눈질만 해도 배우는 게 많았다. 하다못해 프로그램 단축키 사용법이나 책에서 못 배우는 좋은 개발 방법 등도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이 바꿀 수 있고, 사람한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구나. 눈칫밥, 눈물밥 먹으며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찾아갔다. 옥상이나 계단에서 흘린 눈물이 헛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나중에 꼭 써줘야지 하고 식식대며 욕했던 무수한 초창기에 만난 빌런들은 어느새 잊히고, 쓰고 보니 좋은 분들만 남았다.

잘 떠나보낸 것인가. 잊힌 것인가? 스스로도 알쏭달쏭하지만.. 강렬한 것이 더 오래 기억된다는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분명한 건 시작 시점과 끝난 시점이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 IMF와 함께 한 초창기 시절을 뚜벅뚜벅 걸어서 통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좋은 사람들, 고마운 분들과 함께.

빌런들과 맞서 싸우며 조금씩 내공과 내 안에 악이 쌓여가고 있었다. 무협지를 본 적은 없지만, 회사 생활을 하는 건 소림사에서 단련하는 무도인이 되는 것과 다른 듯 닮아 보였다.

어느덧 1900년대가 막을 내리고 2000년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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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첫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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