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편에게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가맹 학원 중 한 곳의 간판 대금 문제로 본사로 항의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새로 오픈을 준비하던 캠퍼스였고, 남편은 몇 달 동안 거의 출근하듯 그곳을 오가며 모든 과정을 챙기고 있었다. 그만큼 애정을 쏟은 곳이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아는 간판업체를 소개해드렸다고 했다.
하지만 원장님은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을 통해 다른 간판업체와 별도로 계약을 맺었다.
문제는, 모든 거래가 견적서나 계산서 없이 오로지 ‘말’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7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에 간판과 시트 작업등을 포함하되,
세부 내역은 남기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다.
원장님은 그 안에 모든 수정과 추가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고,
업체는 별도의 추가비용을 요구했다.
흔히 있을 법한 오해였지만, 이런 오해가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든다.
그날 저녁, 남편은 퇴근 후에도 번갈아 통화를 하며 중재에 나섰다.
밤늦도록 전화기를 붙잡은 채, 한쪽은 억울함을 토로하고
다른 한쪽은 화를 삭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저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듣고, 감정까지 보듬어주면서,
왜 내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흘려듣는 걸까?’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면 미워하려다가도 미워할 수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억울했다.
나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 “그만해, 피곤해”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따뜻하고 인내심 많은 태도를 보인다니.
마치 내가 그에게 너무 익숙해져,
그가 굳이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며칠 후, 그 사건은 의외로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업체 사장님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본부장님이 잘 들어줘서 화가 좀 가라앉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원장님 역시 남편을 통해 업체가 고급 필름과 UV 코팅까지 신경 쓴 사실을 알고 나서 마음이 풀렸다고 했다.
심지어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기 전,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요?”라며 남편에게 확인까지 받았다고 한다.
다음날, 남편은 또다시 감사 전화를 받았다.
그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사람의 갈등을 이렇게 부드럽게 풀어내는 그의 모습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서운했다.
그가 남의 이야기를 이렇게 잘 들어주는 이유는 뭘까.
남편은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 노력한다.
그는 안다. 말보다 더 중요한 건 ‘감정’이라는 걸.
그래서 불편한 침묵도 견디고, 상대가 감정을 다 쏟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아주 적절한 순간, 한마디 던진다.
“그럴 만했겠어요.”
그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속상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금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건 이렇게 하면 돼.”
“그냥 신경 쓰지 마.”
“괜히 마음 쓰지 말고 잊어버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문제를 해결받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내 마음을 공감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위로를 원했고, 그는 효율을 택했다.
그 차이가 우리 사이의 거리였다.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의정부의 한 학원에서 학부모와 원장님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남편은 퇴근 후에도 여러 번 그곳을 찾았다.
학부모 간담회를 열어 직접 이야기를 들어주고, 원장님의 입장도 존중하며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다.
그때도 그는 늦게 들어왔다.
피곤할 법도 한데, 얼굴에는 묘한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오늘은 조금 진전이 있었어. 서로 오해가 많이 풀린 것 같아.”
나는 웃으며 “그랬구나”라고 답했지만, 속에서는 또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왜 남의 오해는 그렇게 정성껏 풀어주면서, 우리 사이의 오해는 그냥 덮어두는 걸까?’
사람은 관계가 가까울수록 상대의 감정을 ‘이미 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깊이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고 느낀다.
그에게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공감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타인에게 정성을 다해 귀 기울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해받으면 안 되는 사람’, ‘신뢰를 잃으면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어차피 이해해줄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내 말은 자주 생략되었고, 내 감정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진짜 관계의 함정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우리는 가장 쉽게 무심해지고,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공감의 노력을 멈춘다.
그건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너무 깊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남편을 탓하다가 문득 거울 속 내 모습을 보았다.
나 역시 남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준 적’이 있었던가?
그가 학원 이야기, 사람 이야기, 업무의 피로를 이야기할 때, 나는 정말 귀 기울였던가?
아니면 ‘또 남 이야기야?’라는 생각으로 대충 대답하며 넘겼던 건 아닐까?
그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남편이 나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도, 결국은 내가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과 같았을지 모른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그 단순한 문장 하나면 충분했을 텐데.
공감은 기술이 아니다.
공감은 ‘너의 감정이 틀리지 않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인식의 언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존중받는 감정이다.
사랑은 거창한 표현이 아니라, ‘들어주는 태도’ 속에서 자란다.
사랑이 식은 관계는 말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공감이 줄어드는 관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진심을 꺼낸다.
그리고 그 진심이 쌓여 관계의 온도를 만든다.
남편은 본질적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 따뜻함의 ‘기준점’이 되어준 사람이다.
다만, 그가 너무 오래 나의 따뜻함에 익숙하고 무뎌져, 나에게 돌려주는 법을 잠시 잊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배우고 알려준다.
서로를 듣는 법을.
공감의 언어를.
그리고, 침묵 속에서도 마음이 전해지는 사랑의 방식을.
남편이 또 퇴근 후에도 늦게까지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이번엔 다른 캠퍼스 문제였다.
그가 통화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을 때, 나는 조용히 물었다.
“오늘도 힘들었지?”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응, 근데 괜찮아. 영이가 이렇게 물어봐줘서.”
그 짧은 대답에 나는 마음이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