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유리문을 밀자 “투둥” 하는 소리가 난다. ‘당기시오’ 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있는 힘껏 문을 당기니 “스윽” 하고 바닥과 문이 부드럽게 닿으며 복도의 적막감이
이내 드라이기소리와 플라스틱바구니가 매달린 카트 끄는 소리, 그리고 파마기계에서 들려오는 멜로디로 생기를 찾는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어요?”라는 말 뒤 웅얼거리며 전달한 내 이름이
딸칵거리는 카운터 옆 마우스에 한번 , 톡톡 눌러지는 무전기에 한번 등장했다 사라진다.
치지직 하는 무전기 소리가 들렸다면 과장을 조금 보태 첩보원 영화의 배경이 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잠시 소파에 앉아 대기하기로 한다.
햇살이 길게 늘어진 오후의 미용실은 손님맞이로 꽤나 분주한 모습이다.
드라이기 전원이 위이이이이잉 켜졌다 멈추길 반복하고 뒤를 이어 "털컥" 하는 코드 꽂는 소리가 난다.
하나의 드라이기가 더 합세하는 것이다. 위이잉 소리가 웨에에에에엥으로 합창을 시작하고 나름 화음으로 들리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머리 손질법을 알려주는 미용사의 목소리 사이로 찰칵찰칵 하는 카메라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머리결과에 만족하는 만큼 채워 넣는 별점 같다. 셔터음 사이로 조용히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말이 오가는 곳에서 낯설지만 따뜻함을 듣는다.
이런저런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호명된 이름을 따라 총총 걸으며 도착한 곳은 샴푸실이다.
철퍼덕하고 의자에 앉으면 가죽과 옷이 맞닿아 ‘뿌드득’ 하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영화관에 앉아 자리를 고쳐 앉을 때 나는 소리, 친구가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차를 얻어 탔을 때 들었던 소리와 조금은 닮은 모습이다.
“물 온도 괜찮으세요?" 일명 무릉도원이세요?
라는 말과 함께 내 머리카락이 샴푸로 몽글몽글 묻어난다.
마치 샤워볼에 거품을 가득 묻혀 손으로 요리조리 비빌때와 같은 보드라운 소리를 듣고 또 들을 때쯤
“쿠루루루룽“ 하며 배수구로 물이 내려간다.
무진장 배고플 때 나의 배가 들려주는 ("꼬르륵 " 보다 더한 “꾸우루룩”이라고 해야 맞을까?) 천둥소리와 맞먹는 우렁찬 소리 덕에 묘하게 동질감을 느끼는 나였다.
젖은 머리를 하고 도착한 곳은 커다란 거울 앞, 바스락 거리는 커트보를 몸에 두른다.
온몸을 덮어서 인지 나는 늘 그것을 ‘식탁보’에 비유하곤 했다.
커트보로 대부분이 가려진 곳에 빼꼼히 나와 있는 나의 발을 보며
커다란 식탁보가 덮인 식탁의 발 밑이 보일 듯 안보일듯한 광경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색-색", 움직일 때마다 존재감을 뽐내는 커트보를 어루만지며 거울 앞 내 모습을 본다.
젖은 머리에 적나라한 조명, 미용실 거울 앞에 앉으면 왜 이렇게 못생겨 보이는지
빨리 나를 환골탈태시켜줄 구세주 미용사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말과 동시에 시작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를 듣는 시간,
바로 머리를 자르는 시간이다.
집중하는 눈빛으로 가득한 미용사의 손끝에서 "샥-샥-샥", 은빛의 가위가 춤을 춘다.
커트보 위에 쌓인 "쇽-쇽-쇽" 하고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며
그동안 머금은 지난 나의 사연들이 흩어지는 것처럼 보여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자라나는 머리에 또 다른 사연들이 채워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가위’라는 같은 글자를 나눠 가졌어도
그들의 역할, 소리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데
특히 머리숱을 치는 가위는 다른 가위에 비해 소리 없이 강한 녀석 같았다.
"석-석" 하는 소리가 몇 번 났을 뿐인데 붕 뜨던 나의 머리가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모양의 소리들을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사자 같던 나의 머리가 서서히 사람처럼 보인다.
조금 더 나은 모습을 위해 오늘은 파마를 하기로 한다. 머리 위에 살랑살랑 피어나는 봄을 선물하기 위하여.
"뿌드드득, 촥 , 탁"
미용사의 양손에 고무장갑이 끼워지며 본격적인 파마가 시작된다.
무심한 듯 여유 있는 모습에서 미용사의 ‘자신감’을 듣는 나의 마음이 참으로 든든하다.
검정 플라스틱 통에 담긴 약이 묻은 거친 붓이 "슥싹-슥싹" 머리 여기저기에 닿을 때마다
거침없이 앞뒤로 양념이 발라지던 학교 앞 떡꼬치가 생각났다.
(색깔은 다르지만 뭐 아무튼, 자세히 보니 붓 모양도 좀 비슷하게 생긴 듯하다.)
양념대신 파마약을 잔뜩 바른 나의 머리에 곧이어 ‘지잉 , 툭‘ 하고 노란 고무줄과 함께 분홍색, 파란색 조각들이 끼워진다.
고무줄이 늘어났다 안착되는 소리가 귀에 들릴 때면 혹시나 얼굴 쪽으로 고무줄 총이 쏘아지는 거 아닐까 하고 혼자 지레 겁을 먹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김밥 말듯 돌돌 말린 머리 위에 ‘촤륵’ 하고 랩까지 얹어주면 오늘의 메뉴(?) 파마가 완성되기 직전이다.
"도르르륵" 거대한 기계가 끌려 오더니 내 머리 위에서 윙-윙 맴돈다. 이윽고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바로 ‘엘리제를 위하여’다.
생에 처음으로 썼던 흑백 핸드폰의 단음 벨소리 같아 괜히 혼자 추억에 젖었다.
"푸슉-푝"
냉면집에서 식초를 뿌릴 때 나는 양념통 소리가
귀 주변을 맴돌며 "쪼르르" 흘러내리는 차가운 액체로 인해 머리카락이 촉촉해진다.
그리고는 "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기계가 거품을 사정없이 내뿜는다.
"쉬-익-쉬-익"
거품이 움직이며 흘러내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오 나 소리 득도 하는 거야?
아 뭐야 귀에 거품이 들어갔다. 어쩐지 엄청 잘 들리 더라니.
"착 착" 미끄러운 오일이 가득한 미용사의 두 손이 요리조리 움직이면 어느새 내 머리에 봄이 물씬 피어난다.
꼬불꼬불, 삐죽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보며 기분 좋은 어색함에 "짝 짝 짝" 가볍게 박수를 쳤다.
“수고하셨어요”라는 말과 함께 커트보가 펄럭이며 서둘러 사라진다.
나의 어떤 이야기들이 이번 머리에 새로이 채워질까?
멋스럽게 손질된 머리를 어루만지며 뚜벅뚜벅 미용실을 걸어 나오는 길,
"쿠쿵" 하고 유리문이 닫히며
"위이이이잉" 하는 드라이기 소리가
떠들썩한 이야기 소리가
화음 없는 엘리제를 위하여 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