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면 잘했어"가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인 이유

영화 <위플래쉬>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본 인정 투쟁

by JUNSE

관점 프리즘 No.12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가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인 이유

영화 <위플래쉬>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본 인정 투쟁

출처 : www.andsoitbeginsfilms.com

박자를 틀리는 자, 뺨을 맞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는 음악 영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재즈라는 가면을 쓴 전쟁 영화이자, 두 에고(Ego)가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스릴러입니다.


최고의 지휘자지만 폭군인 플레처 교수, 그리고 위대한 드러머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제자 앤드류.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의자를 집어 던지고, 뺨을 때리며, 인격을 모독합니다. 그의 지론은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해로운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다."


그는 천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극한의 고통과 한계를 넘어서는 압박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이 잔혹한 교육 방식은 과연 정당할까요? 이 둘의 관계에서 독일 철학자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Master-Slave Dialectic)'의 완벽한 예시를 떠올립니다.



헤겔의 시선 : 인정받고 싶은 자는 노예가 된다

출처 : https://www.thecollector.com/master-slave-dialectic-hegel/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인정 욕구). 두 자아가 만났을 때,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자는 '주인'이 되고, 죽음(공포)이 두려워 굴복하고 인정을 구걸하는 자는 '노예'가 됩니다.


영화 초중반, 플레처는 명백한 '주인'입니다. 그는 밴드라는 세계의 절대 권력자이며, 그의 템포(Tempo)는 곧 법입니다. 반면 앤드류는 '노예'입니다. 그는 플레처의 눈에 들기 위해 손에 피가 나도록 드럼을 치고, 스승의 기분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앤드류의 드럼 연주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인(플레처)의 "Not quite my tempo(내 템포가 아니야)"라는 불호령을 피하기 위한, 인정받기 위한 처절한 노동일뿐입니다.



노예의 역설 : 노동이 주인을 뛰어넘는다

출처 : aninjusticemag.com

하지만 헤겔 철학의 묘미는 그다음 단계에 있습니다. 주인은 노예에게 노동을 시키고 그 결과물을 향유하기만 합니다. 주인은 스스로 사물(악기)을 다루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무능해집니다.


반면 노예는 주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물(드럼)과 씨름합니다. 그 과정에서 노예는 기술을 익히고, 사물의 법칙을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돌파합니다. 헤겔은 말합니다. "노예는 사물을 변형시키는 노동을 통해, 결국 주인보다 더 높은 자의식을 갖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카라반(Caravan)' 연주는 바로 이 변증법적 역전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플레처는 앤드류를 무대에서 망신시키려 함정을 팠지만, 앤드류는 도망치지 않습니다(죽음의 공포 극복). 대신 다시 드럼 앞에 앉아 미친 듯이 연주를 시작합니다.


이때 앤드류는 더 이상 플레처의 큐(Cue) 사인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 박자를 쪼개고, 밴드를 리드합니다. 당황하던 플레처는 앤드류의 압도적인 실력(노동의 결과) 앞에 결국 빨려 들어갑니다.


앤드류가 플레처에게 눈빛을 보내며 "I'll cue you in(내가 신호를 줄게요)"이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는 순간, 노예는 사라지고 새로운 주인이 탄생합니다. 플레처조차 그 순간만큼은 앤드류의 리듬에 맞춰 지휘하는 조력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Good job' 너머에 있다

출처 : www.andsoitbeginsfilms.com

플레처의 방식은 비인간적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뼈아픈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만하면 잘했어"라는 안도감 속에 머물러서는 결코 자신의 껍질을 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앤드류가 위대해진 것은 플레처가 칭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플레처가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였기에, 앤드류는 살기 위해(혹은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파괴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파괴의 끝에서, 그는 스승의 인정조차 필요 없는 '자율적인 예술가'로 거듭납니다.


예술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성장은 인정 투쟁의 역사입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시작한 일이, 고통스러운 수련의 시간을 거쳐 결국은 그 대상을 뛰어넘고 '나만의 것'이 되는 과정.


혹시 지금 누군가의 가혹한 평가 때문에 괴로우신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노예의 시간, 즉 '주인이 되기 위해 단단해지는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 당신의 큐 사인에 세상이 움직이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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