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아웃 2>와 칼 융의 '그림자(Shadow)'로 본 성장
관점 프리즘 No.13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는 주인공 라일리가 13살이 되며 겪는 '사춘기'라는 격변을 다룹니다. 어느 날 밤, 마음 본부에는 "PUBERTY(사춘기)"라는 비상벨이 울리고, 인부들이 들이닥쳐 본부를 때려 부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감정들(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 쫓겨난 자리에 새로운 감정들이 입주합니다. 그중 대장은 단연 주황색의 삐죽머리, '불안(Anxiety)'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 초반의 '불안이'를 보며 불편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라일리를 조종해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고, 기존의 자아를 병들게 하며, 끝내 과호흡(Panic Attack)까지 오게 만드는 빌런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심리학, 특히 칼 융(Carl Jung)의 시선으로 본다면 '불안'은 단순한 악당이 아닙니다. 오히려 라일리가 냉혹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성장의 진통'이자, 너무나 열심히 일하는 '서툰 보호자'에 가깝습니다.
]칼 융은 인간이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 쓰는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저 부모님께 사랑받으면 그만이었지만(기쁨이의 역할), 사춘기가 되면 세상이 확장됩니다. 또래 집단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선배들에게 잘 보여야 하며,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영화 속 라일리는 고등학교 하키팀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진입합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라일리는 '순수하고 엉뚱한 나'를 버리고, '쿨하고 실력 있는 하키 유망주'라는 가면을 써야 합니다.
기존의 대장인 '기쁨(Joy)'이는 이 복잡한 사회적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기쁨이는 "그냥 즐겁게 놀자!"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즐겁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불안'이가 등판합니다. 불안이는 라일리의 페르소나를 완벽하게 구축하기 위해 수천 가지의 미래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합니다.
"만약 선배가 말 걸었을 때 유치한 답변을 하면? 우린 왕따가 될 거야." "내일 시합에서 골을 못 넣으면? 코치님 눈 밖에 나고, 대학도 못 가고, 인생 망할 거야!"
불안이의 이 호들갑은 라일리를 괴롭히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라일리가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사회화(Socialization)'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융은 경고했습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우리가 완벽한 페르소나를 연기하려 할수록, 우리의 내면에는 억압된 감정들의 덩어리, 즉 '그림자(Shadow)'가 자라납니다.
영화에서 불안이는 라일리의 '실수', '부끄러움', '나약함' 같은 기억들을 모조리 "필요 없는 것"이라며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립니다. 그리고 "나는 부족해(I'm not good enough)"라는 강박적인 자아를 심어 끊임없이 라일리를 채찍질합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겪는 번아웃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나(페르소나)를 유지하기 위해, 쉬고 싶은 마음이나 나약한 감정을 그림자 속에 가둡니다. 하지만 융은 말합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저항하면, 그것은 지속된다(What you resist, persists)."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속에서 끓어오르다, 영화 후반부 라일리의 '과호흡(Panic Attack)'처럼 폭발하게 됩니다. 불안이가 폭주하여 콘솔을 장악하고 굳어버린 장면은,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자아의 붕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기쁨이는 깨닫습니다. 라일리가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긍정적인 믿음만 가지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요. 기쁨이는 불안이가 만든 "나는 부족해"라는 기억들, 그리고 버려졌던 수많은 실수와 부끄러움의 기억들을 모두 불러옵니다.
그리고 라일리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신념이 피어납니다.
"나는 이기적이기도 하고, 친절하기도 해. 나는 부족하지만, 꽤 괜찮기도 해."
이것이 바로 융 심리학의 궁극적 목표인 '개성화(Individuation)'입니다. 개성화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밝은 면(페르소나)과 어두운 면(그림자/불안)을 모두 '나의 일부'로 인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입니다.
기쁨이가 폭주하는 불안이를 떼어내는 대신,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불안아, 너도 라일리를 위해서 그런 거지? 이제 좀 쉬어도 돼."라고 말하며 의자에 앉혀주는 장면. 이 장면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불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처방전입니다.
우리는 흔히 불안을 없애야 할 질병처럼 취급합니다. 하지만 불안이 없으면 우리는 미래를 대비하지도, 위험을 피하지도 못합니다. 불안은 라일리를 사랑해서, 라일리의 미래를 지키고 싶어서 잠도 안 자고 콘솔을 돌렸던 가장 헌신적인 일꾼이었습니다. 다만 방법이 조금 서툴렀을 뿐이죠.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건, 불안을 마음의 방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를 위한 작은 의자(Special Chair)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안이 불쑥 튀어나와 "큰일 났어! 미래가 망할 거야!"라고 소리칠 때, 이렇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고마워 불안아. 네가 내 미래를 걱정해 주는 거 알아. 하지만 지금은 내가 운전할 수 있어. 너는 저 의자에 앉아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좀 쉬고 있어."
그림자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동료로 삼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이 됩니다. 당신의 불안이는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있나요? 오늘 밤은 그 녀석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