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

영화 <컨택트(Arrival)>와 비트겐슈타인 : 소리언어의 시간 감옥

by JUNSE

관점 프리즘 No.14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

영화 <컨택트(Arrival)>와 비트겐슈타인 : 소리 언어가 만든 '시간의 감옥' 탈출기

출처 : www.studiobinder.com

1. 외계인과 싸우지 않는 유일한 SF 영화


어느 날 갑자기 지구 전역 12곳에 거대한 조약돌 모양의 미확인 비행 물체(쉘)가 나타납니다.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당장 F-22 전투기를 띄우고 미사일을 쏘며 지구를 지키는 전쟁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컨택트>는 총 대신 '화이트보드'와 '마커'를 든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그녀의 임무는 단 하나입니다. 외계인(헵타포드)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알아내는 것.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기괴한 형태였습니다. 그들은 입으로 소리를 내는 대신, 허공에 먹물을 뿌려 복잡한 '원형의 문자(Logogram)'를 그려냅니다.


영화는 루이스가 이 난해한 외계 언어를 해독하는 과정을 통해, 단순히 "말이 통한다"는 차원을 넘어 "언어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시간관을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2. 소리 언어의 치명적 결함 : 우리는 '선형적 시간'의 노예다

출처 : www.sheknows.com

우리는 평소에 자각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철저하게 '소리(Sound)'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에는 물리학적으로 치명적인 제약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순서(Sequence)'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을 말하려면, '나는'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 '너를', 마지막으로 '사랑해'를 말해야 합니다. 두 단어를 동시에 발음할 수는 없습니다. 즉, 인간의 언어는 선형적(Linear)입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세상을 [과거 → 현재 → 미래]라는 일직선의 시간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합니다. 언어가 순서대로 흐르니, 사고도 순서대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원인(과거)이 있어야 결과(미래)가 있다는 인과율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이를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


우리가 사용하는 '소리 언어'가 선형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관 또한 '선형적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는 기차 위에 탄 승객과 같아서, 지나간 풍경(과거)은 다시 볼 수 없고, 다가올 풍경(미래)은 알 수 없어 늘 불안에 떱니다.



3. 헵타포드의 선물 : 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의 세계

출처 : scifi.stackexchange.com/

반면, 영화 속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헵타포드 B)는 소리가 아닌 '시각(Visual)' 언어입니다. 그들이 허공에 그리는 먹물 문자는 복잡한 원형(Circle)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들은 문장을 쓸 때 첫 단어부터 순서대로 쓰지 않습니다. 문장의 전체 구조, 즉 주어와 목적어, 결론을 머릿속에서 한 번에 통째로 구상한 뒤, 양손으로 동시에 원을 그려 완성합니다. 그들에게는 '과거-현재-미래'가 나누어져 있지 않고,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언어학자 루이스가 이 언어를 깊이 배우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 :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에 따라, 루이스의 뇌 구조(회로)가 재배선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일직선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그녀의 눈앞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모습, 딸과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 그리고 그 딸이 병으로 일찍 죽게 되는 슬픈 미래가 마치 '현재의 기억'처럼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이것은 초능력이나 예지력이 아닙니다. 언어의 한계를 깨고 시간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그림처럼 '조망(Overview)'하게 된 것입니다.



4. '무기(Weapon)'가 아니라 '도구(Tool)'

출처 : screenrant.com

영화의 클라이맥스 갈등은 '오역'에서 시작됩니다. 헵타포드들이 "너희에게 무기를 주겠다(Offer weapon)"라는 메시지를 남기자,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핵전쟁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초월한 시각을 얻게 된 루이스는 깨닫습니다. 그들이 말한 '무기'는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에게 선물하려 했던 '그들의 언어(Language)', 즉 '시간을 초월하는 도구(Tool)'였음을 말이죠.


인간들은 "소리를 내어 순서대로 말하지 않으면 뜻을 전할 수 없다"는 소리 언어의 한계 때문에 서로 불신하고 총을 겨눴지만, 루이스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미래의 정보(중국 장군의 전화번호와 유언)를 현재로 가져옴으로써 전쟁을 막아냅니다. 소리의 한계를 넘어선 소통이 인류를 구원한 것입니다.



5. 슬픈 미래를 알면서도 껴안을 수 있는가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이면서도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깁니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어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다 보았습니다. 동료 물리학자인 이안과 결혼해 예쁜 딸을 낳지만, 결국 이혼하게 되고 딸은 희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말이죠.


보통의 인간(선형적 시간관)이라면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다가올 슬픔까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이안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딸을 낳는 길을 선택합니다.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 길을 선택하고 모든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루이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한계를 넓힘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무한히 확장했습니다. 그녀에게 삶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불안한 질주'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고 체험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어떤가요? 우리는 매일 "빨리빨리", "시간 없어", "나중에 행복해질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시간의 노예로 만들고 있지는 않나요? 때로는 눈을 감고 소리 언어의 잡음을 끈 채, 내 인생이라는 전체 그림을 조용히 응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기쁨과 슬픔이라는 모든 시간을 온전히 껴안는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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